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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정부·규제 완화로는 금융위기 돌파 못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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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호 35면

세계 금융위기는 점점 더 넓게, 그리고 더 깊이 퍼지고 있다. 불길은 이미 우리 경제에도 옮아 붙었다. 국내 금융기관들이 겪고 있는 유동성 위기는 실물경제에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아직은 금융기관들의 유동성 문제로 보이지만 이를 빨리 풀어주지 못하면 곧 가계와 기업에 대한 금융 부실의 문제로 번지게 될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형 금융기관의 부실이 깊어져, 이를 치유하고 금융시장을 다시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공적 자금의 투입뿐 아니라 구조조정과 제도 개편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세기적 금융위기는 결국 각국의 금융부문뿐 아니라 사회·경제제도, 나아가 정치환경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지금은 각국에서 불길을 잡기 위해 소방수들이 뛰어다니지만 조금 지나면 사냥꾼들이 뛰어다니게 될 것이다.

부도위기에 몰린 기업 사냥꾼에서부터 누군가에게 이번 위기를 초래하고 증폭시킨 책임을 묻고 싶어하는 마녀 사냥꾼들까지 여기저기서 몰이를 시작할 것이다. 지금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금융가의 임직원들이 직장을 잃고 있지만 조금 지나면 박봉으로 버텨온 근로자, 영세 상인들이 거리로 내몰릴 것이다. 그들은 일터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자녀 교육과 미래를 위해 준비해 온 조그마한 금융자산마저 가치가 폭락한 것을 보고 절망할 것이다. 이들은 이번 사태를 초래한 금융가의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이 이런 위기를 초래하도록 방치한 정부와 제도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게 될 것이다.

역사는 흔히 이런 경험을 보여준다. 1930년대 대공황은 미국의 금융제도와 경제정책을 바꾸어 놓았다. 분노한 대중은 제물을 갈구했고 정치권은 주식시장 붕괴와 경제공황의 책임을 금융업자들에 전가했다. 대형 금융회사와 금융업자들은 위기를 초래한 범죄 집단으로 취급됐고, 상원 청문회는 금융업자들의 불건전한 영업행위, 권한의 오·남용, 그리고 각종 비리를 폭로했다. 청문회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J P 모건의 경우, 그의 방만한 사생활과 함께 소득세 탈루, 단골 고객에 대한 특혜 제공 의혹이 제기되며 수모를 겪었다. 그 결과 이후 30~40년간 금융 질서를 주도한 글래스-스티걸 법으로 대표되는 금융규제의 대폭적인 강화와 ‘뉴딜(New Deal)’이라는 경제정책 틀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번 금융위기는 위기 극복을 위한 국민의 단결과 야당의 협력을 호소하게 함으로써 일견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입지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그렇지도 않다. 이번 위기는 오히려 그의 정책 추진이 험로를 맞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어떤 지도자든 성공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한다. 첫째, 지도자가 뚜렷한 비전을 가져야 하고, 둘째로 그 비전이 시대적 요구와 맞아떨어져야 하며, 셋째로 그 비전을 정책으로 구체화시킬 유능한 참모진을 가져야 하며, 넷째로 그런 정책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정치적 세(勢)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은 이 네 가지 조건에 스스로를 비추어 볼 때 어떤 답을 내릴지 모르나 적어도 둘째·넷째의 조건은 시간이 감에 따라 그에게 불리해져 갈 것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소위 ‘좌파정권 심판론’으로 극히 우파적인 정책조합을 택해온 이 대통령은 산업은행을 포함한 공기업의 민영화, 금산분리 완화, 친기업 정책이라는 기치 하에 작은 정부와 시장 규제의 대폭적인 완화를 공약해 왔다.

이 대통령이 내건 정책 중 우리 경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바람직하고 꼭 실현돼야 할 부분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기본 방향은 점점 강한 정치적 저항에 부닥칠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내건 정책조합의 틀이 처음부터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었으나 이번 금융 위기는 이 틀만으로 경제 분야에서 성공한 지도자가 되기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향후 정치·경제적 지평은 경제적 약자와 사회통합을 위한 복지체계의 강화, 그리고 이를 위한 큰 정부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 시점에서 버릴 정책은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정책의 틀을 짜야 한다. 그래야 시장경제도 지켜낼 수 있다. 만약 이에 실패하면 그의 임기 중 경제난과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고 반(反)시장주의 세력을 공고히 만들어 줄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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