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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의 귀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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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케인스가 돌아왔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구할 구세주로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경제무대에 복귀했음을 선언했다. 대공황 발생 직후인 1933년 케인스는 “ 만일 정부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현존하는 모든 계약 구조와 차입 수단이 차례로 붕괴하고, 금융권과 정부의 리더십에 대한 철저한 불신이 이어질 것이며, 그 뒤에 올 궁극적인 결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참으로 불길하기 짝이 없는 예언이다. 그의 예언은 작금의 주식시장 폭락과 금융위기에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세계 각국 정부는 70여 년 전 케인스가 내놓은 처방대로 특단의 행동에 나섰다. 금융회사에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부실 은행을 국유화하는가 하면, 이자율 인하는 물론 감세와 재정 지출 확대를 통해 대대적인 경기 부양에 나서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경제학계의 중심에서 밀려났던 케인스주의가 미국발 금융위기를 배경으로 화려하게 전면에 재등장한 것이다.

여기다 자칭 신케인스주의자인 폴 크루그먼이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지명되자 케인스 경제학은 마치 시대의 주류인 양 대접받기에 이르렀다. 케인스식 처방의 핵심은 공황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는 정부가 재정 지출 확대를 통해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위기의 충격으로 소비가 줄면 생산이 줄고, 생산이 줄면 결국 소득이 줄어 다시 소비가 줄어드는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이 벌어진다. 이때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시장이 스스로 이 악순환의 고리를 결코 풀지 못한다는 것이 케인스의 이른바 ‘유효수요이론’이다. 펌프로 물을 퍼 올리려면 물 한 바가지를 먼저 펌프에 붓는 것처럼 경제가 제 힘으로 일어서지 못할 때는 정부가 우선 돈을 퍼부어야 경제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대공황 때는 최악의 디플레이션이 벌어지고 있었다. 1934년 케인스는 후버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만나 자신의 처방을 제시했다. 적자를 무릅쓰고 재정 지출을 대폭 늘리라고. 그러나 균형예산을 중시했던 루스벨트는 케인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불황이 장기화되자 마지못해 공공사업이나 농가보조금 지급 등 재정 지출을 통한 경기 부양에 나섰지만 끝내 균형 예산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케인스식 유효수요이론이 본격적으로 작동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참전에서 비롯된 전쟁물자 수요였다. 사실 그 이전에는 케인스의 이론을 제대로 실행에 옮긴 적이 없기 때문에 그의 처방이 맞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여기서 이토록 장황하게 케인스 이론과 실상을 소개한 것은 최근에 급부상한 케인스주의가 오히려 위기 대응에 혼선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발생 이후 나온 반응 중의 하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몰락하고 케인스주의가 부활했다는 것이다. 정부 개입을 가급적 줄이고 시장의 자율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가 금융위기를 초래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마땅히 폐기돼야 하며, 위기 대응책으로 정부 개입의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일부 논자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작은 정부’ 대신 ‘큰 정부’를 추구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인식의 착오가 깔려 있다. 우선 금융위기 해소에 정부가 나서는 것 자체가 케인스식 처방은 아니다. 금융회사에 구제금융을 퍼붓고, 일시적인 국유화까지 감행하는 것은 금융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일 뿐 케인스가 제언한 경기 부양용 재정 지출의 확대가 아니다. 또 실물경제의 침체에 대응한 감세와 재정 지출 확대 역시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응급조치이지 그것이 일상적으로 정부의 기능을 확대해야 한다는 논거가 될 수 없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금융시장에서의 감독은 더욱 강화하는 것이 맞다. 그렇다고 정부의 몸집을 불리고 정부 규제를 늘리라는 것은 아니다.

케인스의 모국 영국에서는 케인스식 처방이 장기적인 해법이 될 수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금융위기를 빌미로 ‘규제 확대’와 ‘큰 정부’를 주장하는 것은 아마 케인스도 원치 않을 것이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