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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낙관이 부른 재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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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6강전>
○·이영구 7단(한국) ●·저우루이양 5단(중국)

 제9보(114∼133)=낙관은 행복한 병이다. 이영구 7단은 전보에서 백△ 두 점과 흑 ▲ 두 점을 아낌없이 교환했는데 그야말로 헤픈 수였다. 이젠 어쩔 수 없다며 114부터 계속 밀어붙이자 난데없이 좌하 일대에 흑의 떼집이 생겨났다. 129에 이르러 세어 보니 줄잡아 50집. 백도 10집 언저리 늘어났지만 흑의 불로소득(?)에 비하면 몇 푼 안 된다.

검토실에선 박영훈 9단이 114를 판에서 떼어내 ‘참고도’ 백1에 갖다 놓으며 혼잣말을 한다. “이젠 너무 늦었을까.” 박영훈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표정이다. 왜 좌하 귀를 건드려보지도 않고 그대로 집으로 굳혀주느냐 말이다(‘참고도’의 경우 A로 받아주면 이득이지만 지금은 흑▲ 두 점을 배경으로 강력하게 2로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다).

이영구에게 물어보면 씩씩하게 대답할 것이다.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낙관이고 방심이다. 갑자기 찾아와 판단력을 마비시키는 내면의 적… 사실 좌하를 거저 굳혀준 이 사건 전만 해도 바둑은 금방 끝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나 129가 놓였을 때 이미 형세는 간단치 않아졌다. 백 집이 70을 넘어섰다지만 흑도 70집이 넘는다. 이영구도 이 사실을 이미 눈치챘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후회해 봐야 때는 늦었다. 이영구는 눈썹을 곤두세우며 다시 판으로 달려든다. 지옥 같은 종반 레이스가 시작됐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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