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산마을>20.경북 봉화 신흥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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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高해룡(63)씨는 요즘 살맛이 난다.
자식 3남1녀가 모두 자신과 같이 유기(鍮器.놋그릇)만드는 일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장남 태주(44)씨와 3남 호규(32)씨는 직접자신을 도와 놋그릇을 만들고 둘째 아들 준호(37)씨는 독립해 예천에서 유기공장을 운영한다.
막내딸 준정(31)씨마저 놋으로 은장도.창.칼등 공예품을 만들고 있다.30여년전 친구 金기두(63)씨와 둘이서만 놋그릇 제작에 나섰던 때와 비교하면 우선 외롭지 않다.유기제작에 평생을 바쳤던 조상들에게도 볼 낯이 생겼다.지난해엔 경북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명예도 얻었다.
무엇보다 마을이름에 걸맞은 명성을 되찾았다는 것이 가슴 뿌듯하다.高씨가 사는 삼계리(경북봉화군봉화읍)의 다른 이름은 「신흥리(新興里)」다.새롭게 번성하는 마을이란 뜻이다.
조선조 순조 30년(1830년께)에 곽씨성과 맹씨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 정착해 유기를 제작하면서 마을이 크게 번창했다고해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신흥마을 유기는 한창때인 1920년대엔 전국 수요의 70%이상을 공급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유명한 안성유기도 이곳에서 기술을 배워갔다고 한다.한창땐 마을70여가구중 40가구가 유기를 제작하고 나머지 집은 품을 팔았다. 그래서 신흥마을 주변은 아직도 「놋점거리」라 불린다.高씨는 『소백산과 태백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어 쇠를 녹이는데 필요한 숯의 생산이 쉽고 근처 내성천의 풍부한 물이 천혜의 입지로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는 高씨가 운영하는 「봉화유기」와 金선익(62)씨가 소유한 「내성유기공구」두집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플라스틱과 스테인리스제품이 우리의 옛 놋그릇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지방의 경우 시설과 공구가 기계화돼 옛 모습을 잃어가는 추세지만 봉화유기만은 아직도 수(手)제작의 옛 기풍을이어가고 있다.
사실 두집이라도 명맥을 유지한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高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21세때 고향을 등지고 12년동안 유기수출공장에서 일한다.그 기간중 신흥마을의 유기제작은 맥이 끊어졌다.그러나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고향에 돌아오면서 생전에 『가업을 이어라』고 되뇌던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유기제작에나선다.이후 김선익씨도 유기제작에 나선다.
신흥마을 유기는 인천 송도에서 흙을 가져와 일정한 틀(器本)을 만들고 쇳물을 녹여부어 두들기면서 만든다.
유기의 품질은 「부질」과 「가질」기술이 좌우한다.부질은 동과주석을 함께 녹인 쇳물을 부어 모양을 만드는 과정이고,가질은 광택을 내는 다듬기작업을 말한다.
이 과정이 1주일이나 모두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작업은 까다롭다.그러나 이런 노력때문에 봉화유기는 은근한 멋이 있고 닦으면 닦을수록 광택이 빛난다.
신흥마을에서 주로 제작하는 유기는 반상세트.제기세트.불기세트등이다.수작업이고 전량 주문생산이기 때문에 1주일에 10세트 정도를 만드는 것이 고작이다.최근엔 옛것을 선호하는 현대인의 욕구로 주문이 쇄도하고 있어 요즘 두집의 유기만 드는 손놀림은경쾌하기만 하다.
봉화유기((0573)73-1987),내성유기공구((0573)73-4836).
글=하지윤.사진=임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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