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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달라져야한다>4.'通法府'의 擧手機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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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해 11월 정기국회.『강원도 폐광지역에 내.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카지노를 설치한다』는 정부의 폐광지원특별법안이 제출됐다. 국민회의 유인학(柳寅鶴)의원은 소속 상위인 통상산업위에서당론과는 달리 반(反)표를 던졌다.그러나 『15대 총선에서 강원도 표를 까먹으려고 작정했느냐』는 당지도부의 일침에 柳의원은결국 본회의에서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행 독립을 사실상 좌절시킨 한은법(韓銀法)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됐다.재경위 소속 박명환(朴明煥.신한국당)의원은 당론과달리 반대의사를 표시했다.소란이 일어났다.즉각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으니 그렇게 알고 가만히 있으라』는 총무 등 당중진들의제지가 시작됐다.朴의원은 『그렇게 대통령에게 보고한 사람들이 잘못』이라며 끝내 반대표를 던졌다.
그러나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고 『믿지 못할 위험인물』『자기인기만 관리하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이 등뒤에서 들려왔다. 지난해 12월.겨울아시안게임.유니버시아드 지원을 위해 강원도 발왕산과 무주의 자연환경 훼손을 허가해달라는 정부측 특별법안이 상정됐다.국민회의 김충조(金忠兆).신계륜(申溪輪).김원길(金元吉)의원 등은 찬성 당론을 거슬러 반표를 던졌 다.
동교동측으로부터 『전북 발전을 위한 것이니 가만히 있으라』는압박이 가해졌다.호남 출신인 김충조의원은 『당신이 그럴 수 있느냐』는 소리도 들어야 했다.동료들로부터도 『환경은 당신들만 생각하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김원길의원은 『튀 려는 의원이라는 오해에 시달려 그후론 소신투표를 자제했다』고 실토했다.
위에 든 예는 매우 희귀한 경우일 뿐이다.『솔직히 법안 내용도 모른채 총무단의 지시에 따라 찬성기립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이름 밝히기를 꺼린 한 초선의원이 스스로 「거수기」노릇을 했노라고 고백한 것이 의원들의 자화상이라고 보면 ■림 없다.
당론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본회의 표결때 여야 어느 한쪽만 기립하고 한쪽은 앉아있는 「일사불란」한 장면이 종종 연출된다.
여당이 기립할 때 앉아서 반대표를 행사하는 여당의원이나 여당쪽에 동조해 기립하는 용기있는 야당의원을 찾아보기는 극히 어려운실정이다.
나름대로의 소신과 선택이 외부에 알려지는 길도 제도적으로는 차단된 상태다.우리 국회는 개별의원들의 표결내용에 대한 기록이전무(全無)한 「이상한 의회」이기 때문이다.
국회 어느 곳에서도 의원들이 무슨 법안에 각자 어떤 선택을 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의사록에는 단지 찬반 총수만 집계돼 있을 뿐이다.
역(逆)으로 잘못된 선택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독재시대에 정통성없는 권력의 행사를 뒷받침해주던 각종 「악법(惡法)」들을 누가 지지 또는 반대했는지 정리돼 있지 않은 것이다.상당수 의원들은 익명으로 「반(反)역사의 선택」을 한 대가로 일신의 영달을 지속할 수 있었다.
소신에 따른 선택을 전제로 하는 교차투표 부재현상은 그 통계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14대국회 가결안건 1천1백12건중 본회의 표결은 6%인 66건에 불과했다.나머지는 의장이 『이의없습니까.없으면 통과됐습니다.땅 땅 땅』식의 만장일 치 처리다.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6%의 민주국회인 셈이다.
국민회의의 신기하(辛基夏)전총무는 『표결의 익명성은 책임지는정치를 불가능하게 한다』며 『각종 악법의 날치기 통과가 가능한것도 결국 표결의 투명성 부재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경우 의회에서 매주 발간되는 「의회보」는 물론 주요신문에 상하 양원의원들의 찬성.반대.기권 등의 표결내용이 실린다.유권자는 자신의 대표가 어떻게 그들의 이익을 대변했는지 쉽게궁금증을 풀 수 있다.우리 국회법에도 기명.전자 (電子).호명투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14대국회에서 이같은 기록표결이 이뤄진 적은 단 한번도없었다.왜 표결의 문화가 실종된 것일까.
안건 처리내용을 들여다보면 더욱 한심스럽다.14대국회의 경우정부가 제출한 5백81건의 법안중 92%인 5백37건이 가결통과된 사실은 국회가 사실상 「통법부(通法府)」 역할에 머무르고있는 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의원들이 제출한 법안은 3백21건중 37%인 1백19건만 가결됐을 뿐이다.국회의 박찬표(朴璨杓)입법조사관은 『오랜 민주.반민주 대결구도에서 엄격한 정당의내부기율이 생겨나 동료관계여야 할 의원들의 원내활동마저 정당의수직적 위계에 종속된 때문』으 로 이를 정리한다.
국회의 기능이 통법부.거수기에 머무르는 현실은 급기야 의원정수를 대폭 줄여야 한다는 논의를 낳고 있다.경실련의 박병옥(朴炳玉)정책실장은 『국회의 입법활동 효율성과 시.구의원 수준의 지역구 활동을 감안할 때 현재 15만명당 1명꼴인 의원정수에 대해 적정한 재산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전국구를 없애든가 지역구와 전국구를 동수로 하면서 대폭 의원정수를 줄이는 방안도 깊이있게 검토돼야 할 문제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국회의 역기능이 15대에도 계속될 경우 이 논의는 본격적인 공론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15대총선 당선자를 대상으로 한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56%가 『제재를 감수하고 당론과 달리 소신투표할 용의가 있다』는 대답을 내놨다.물론 대부분 신인들이다.신인 진출이 많은 15대국회에 거는 기대를 이들이 얼마나 충족시켜줄지 는 여전히 의문이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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