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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디터 칼럼

정권교체의 경험에서 얻은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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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민주화의 기수였던 그가 왜 이 모양이 됐을까. 국민당의 50년 집권을 끝내고 2000년 그가 집권했을 때 기대가 컸다. 어려운 소농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재야 변호사로 반체제 잡지를 만들다 옥고를 치렀다. 반체제 인사들과 민주진보당을 만들었고,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다. 부패 추방, 청렴 정치가 그의 상표였다. 그런 그가 그렇게 공격했던 부패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천수이볜의 실패가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50년간 군림해 온 국민당이 야당을 경험해 봤다. 부패의 끈을 잘랐다. 국민을 보는 눈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구의 85%나 되는 본성인(本省人) 중심의 정당이 집권해 봤다는 점도 중요하다. 외성인과의 이질감을 극복하고, 국정을 함께할 기반이다. 정치는 수학 공식처럼 숫자만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정치가 ‘가능성의 예술’인 것은 인내와 이해와 포용이 있기 때문이다. 역할 교환의 경험 없이는 기대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 경험이 소중하기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너무 자주 그런 경험을 잊어버리곤 한다.

#2000년 7월 24일 국회 운영위원회. 오후 2시28분 위원장 대리인 천정배 의원이 개의를 선언한다. 출석자에는 위원장인 정균환 의원이 포함돼 있지만 속기록에 사회권을 넘겨주는 절차는 기록돼 있지 않다.

“운영위원회 개의를 선언합니다. 의사일정 제2항 국회법 중 개정법률안을 상정합니다. 제안 설명과…(장내 소란) 심사보고는 유인물로 대체합니다. 나머지 토론은 생략하고…(장내 소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속기록은 이어서 ‘14시29분 회의 중지, 계속 개의되지 않았음’이라고 적어놨다. 16대 국회를 100일이 넘도록 파행으로 몰고간 날치기 사건이다. DJP 연합의 파트너인 자민련을 위해 국회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의석 20석에서 10석으로 줄이려 한 것이다. 50번이 넘는 역대 정권의 날치기를 몸으로 막아온 정통 야당의 어이없는 변신이다.

82일간 표류하던 국회가 원 구성을 끝냈다. 원내대표끼리 합의해도 돌아가면 뒤집었다. 청와대가, 또 당 대표가…. 민주당은 촛불시위의 눈치를 보며 발목을 잡았고, 한나라당은 단독으로 원 구성을 하겠다며 힘으로 밀어붙일 기세였다.

여야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직후 개원 국회의 첫 모습이 아직은 흡사하다. 여야와 다수당이 바뀌었을 뿐이다. 서로 주장하는 내용도 그대로다. 다수당은 국회법과 다수결을 내세우며 밀어붙이고, 소수당은 합의정신을 요구하며 육탄 저지를 불사한다. 그나마 타협에 이르게 한 건 역할교환의 경험 덕분이 아닐까. 이런 악순환을 계속할 순 없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이 몸싸움과 억지와 고함뿐이다 보니 되지도 않은 명분으로 법을 무시하고, 억지와 떼쓰기가 통하는 풍조를 퍼뜨리고 있다. 야당 대표가 수배자를 찾아가 정치권 합의의 양해를 구해야 하는 지경이다. 불법을 저질러도 정치탄압이라며 버티니 방송 PD도, 노조도 따라 한다.

한나라당은 아예 국회법을 개정하겠다고 한다. 의장석이나 상임위원장석을 점거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의장석을 점거하면 의장이 퇴장 명령과 함께 5일간 직무정지를 할 수 있는 영국 제도를 연구 중이라고 한다. 당연히 가야 할 방향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만 고치면 유리한 쪽이 뻔하다. 지금 다수당인 한나라당이다.

정치는 다른 사회 영역과는 다르다. 효율성보다는 협상과 타협이 좀 더 강조돼야 한다. 협상하고, 타협하고, 합일점을 만들어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 정치인에게 기대되는 역할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수파의 독주가 된다. 날치기 악법의 기억이 생생하고, 정치인의 줄서기가 변하지 않았기에 더 위험하다. 소수파에게도 필리버스터링 같은 합법적 저항 수단은 보장해 줘야 한다. 서로 입장이 바뀌어도 합의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만들었으면 지켜야 한다. 그 결과는 탄핵 표결처럼 국민의 심판에 맡기면 된다.

김진국 정치·국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