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곱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우리나라 속담 중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말이 있다. 좁은 땅덩이에 여러 사람들이 살다 보니 서로 부딪치는 일도 많았을 것이고, 이런 갈등을 감정 상하지 않고 무난히 해결하려면 서로 조심조심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옛사람들의 지혜가 깃들어 있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에는 거꾸로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곱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조그만 교통사고가 나면 평소에는 순하고 착한 사람도 먼저 나가 무조건 상대편이 잘못했다고 큰 소리를 내고 본다. 그래야 상대편이 주눅이 들어 적어도 자기가 손해 보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위를 해도 조용히 의사표현을 하기보다는 차도를 점거하고 폭력적이 되어 경찰과 충돌해야 세간의 주목을 받아 의사도 충분히 전달되고 경찰도 심하게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특히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정치권의 막말이다. 선거 때에는 상황이 급박해서 그러려니 했지만, 선거가 끝난 후에도 사안마다 극도로 과격한 표현을 써가며 논평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상대편을 매국노나 파렴치범으로 몰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주고받고 나서 다시 만나 국사를 논의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더구나 요즘에는 공정한 심판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행태에 차가운 이성적 비판을 해야 할 언론마저 편이 갈려 상대편에 대해 심한 말을 토해내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어 개탄스럽다. 물론 아직은 익명성에 숨어 차마 얼굴보고는 하지 못할 말들이 난무하는 인터넷 공간보다는 덜하지만, 미워하면서 닮아간다고 그 차이는 점점 작아지는 듯하다.

어느 사회학자가 인터넷의 익명성이 사람들의 공격성을 부추겨서 잘못하면 ‘증오의 확산’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온라인·오프라인 관계없이 모두 ‘증오의 확산’에 일조하고 있는 형국이다.

오죽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대통령에게 “널 살인하겠다”는 섬뜩한 욕설을 퍼붓게까지 되었을까. 이처럼 험하게 내뱉는 말들은 사람들의 심성을 피폐화시키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 간에 감정적인 골을 깊게 만든다. 결국 사회적 갈등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또 하나의 부작용은 목소리 큰 사람의 요란함에 정신이 팔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이야기지만 조용조용히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과학기술계가 이런 종류의 피해를 많이 보는 편일 것이다. 올해 초 정부부처의 개편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도 결국 목소리가 컸던 집단의 주장만 관철되었고 국가의 장래를 위해 중요한 과학기술은 그 목소리가 작아 피해를 보았다고 많은 과학기술인은 생각하고 있다.

이처럼 정부의 정책이나 사회적 갈등의 해법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의 크기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선진 사회의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국내에서의 이러한 행태에 익숙해서인지 국제적인 문제까지도 커다란 목소리면 해결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독도 문제가 터질 때마다 정치가들은 일본에 험한 소리를 해대고, 실현 가능성 없는 과격한 해법을 제시하곤 한다. 여기에 제도권의 언론과 네티즌들도 박자를 맞추고, 시위가 뒤따르며 가끔 국제적인 상식에 어긋나는 돌발행동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국제적인 문제는 커다란 목소리가 아니라 실질적인 힘과 이성적 설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세계화에 의해 서로가 하는 일이 모두 공개되는 세상에서 국제적 공감을 얻기 어려운 극단적 행동은 문제해결에 오히려 어려움을 줄 수 있다.

이제 중국의 대지진에 대한 어느 국내 네티즌의 악성 댓글이 중국 내에서 반한(反韓) 정서를 촉발할 정도로 세계는 좁아졌다. 조그마한 땅덩어리인 국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좁아진 세상일수록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농축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의 가치와 효용성은 더욱 빛난다.

사람마다 의견의 차이는 있을 수 있고 이에 따라 사회적 갈등은 생기게 마련이지만, 그 차이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험한 말로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좌(左)건 우(右)건 어차피 같이 살아가야 할 우리 국민이고, 싫건 좋건 서로 교류해야 할 이웃나라 사람들이 아니던가.

오세정 서울대 자연대학장·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