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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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낡고 자그마한 집이지만 맛은 일품이라며 콕 로빈이 예약해준 레스토랑이다.
세일럼에 있는 너새니얼 호손의 집처럼 여러개의 박공지붕이 있는 가게 안엔 미로(迷路)와 같은 계단을 따라 작은 방들이 마련되어 있어 은밀한 회식을 갖기가 좋아 보였다.
정시에 도착했는데도 시동생은 아직 와있지 않았다.「신희」라는약혼녀와 함께 만난 날 외엔 항상 약속시간보다 늦게 오곤 한 것이 기억났다.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버릇이다.어딘가 허술한 데가 있는 남자는 아닌지….15분이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속이 부글거렸다.혹시 바람맞히는 것은 아닐까 초조했다.
약간 불편한 듯 한두번 앉음새를 고치기는 했으나 애소는 의외로 태연했다.새로 사입힌 레몬색 원피스와 아리영이 물려준 까만귀고리가 잘 어울려 화사했다.
약속시간을 20분이나 넘겨서야 시동생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어찌나 차가 밀리는지….』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는 장승처럼 서서 별난 짐승이라도 발견한 듯 애소를 바라봤다. 『안녕하셨어요,서방님.』 아리영은 의자에서 일어나 시동생을 맞았으나 애소는 앉은 채로 말없이 고개만 수그려 인사했다.당돌한 아이다.
탈 같이 굳은 얼굴로 좌정한 시동생은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를꺼내 물었다.
『미안합니다만 이 가게는 「금연」지정이 돼있습니다.』 그를 안내하여 온 종업원이 말렸다.미처 불이 댕겨지지 아니한 담배는그대로 시동생 재킷 호주머니로 구겨져 들어갔다.
『웬일이십니까?』 퉁명스레 그가 물었다.
『서방님! 우린 따지러온 것이 아니니 서로 차분히 얘기 나누었으면 해요.그보다 먼저 식사를 하십시다.』 아리영은 웨이터에게 주문해둔 음식을 가져와달라고 당부했다.와인에서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아리영과 애소의 입맛에 맞춰 콕로빈이 미리 주문해준 것이다.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음식이 나오기 전에애소가 아리영에게 물었다.다소곳한 몸짓이었으나 말투는 결연(決然)했다.
아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뜻밖의 태도가 아리영만이 아니라 시동생까지 놀라게 하고 있었다.
애소는 핸드백 속에서 한통의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저는 이선생님 아기를 가졌습니다.』 『잠깐!』 시동생이 오른손을 들고 끼어들려 했으나 애소는 틈을 주지 않았다.
『이 사실을 인정치 않으시려거든 여기에 사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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