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이중섭거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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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56년 9월6일 화가 이중섭(李仲燮)은 불귀(不歸)의 객이 됐다.나이 40의 요절(夭折)이었다.서울적십자병원은 사망원인을 간장염으로 적었지만 사실은 정신분열증과 극도의 영양실조가빚은 결과였다.시신(屍身)은 사흘동안 무연고로 방치됐으며,지불해야 할 입원비 18만환이 남아 있었다.
50년대 한국은 절망의 땅이었다.전쟁이 남긴 상처는 온민족에게 지울 수 없는 피멍으로 남았다.
전쟁의 와중(渦中)에서 너나할것 없이 겪었던 가난과 절망,그중에서도 예술가들이 겪은 고난은 가혹했다.이중섭의 전기를 쓴 고은(高銀)은 예술가에겐 그의 예술이 후세에 남겨져 누릴 예술적 명예에 대한 보상을 위해 예술 이상의 비극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될,여느 사람들이 해득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고 썼다.그는 이중섭이 행복이란 개념 자체를 거의 생득적(生得的)으로 버렸던 예술가였다고 성격지웠다.
6.25가 일어났을 때 원산에 있던 이중섭은 그해 12월 남쪽으로 피난했다.일본인 아내 남덕(南德),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였다.부산 피난생활은 극도의 궁핍과 고난,바로 그것이었다.부두노동으로 얻는 적은 수입과 피난민 구제품으로 이 어가는 절망적 삶에서도 그의 예술혼(藝術魂)은 시들지 않았다.
부산은 이중섭의 예술이 꽃피기엔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그는 불현듯 제주도를 머리에 떠올렸다.마치 폴 고갱이 타히티섬을 생각했던 것처럼.51년 1월부터 시작된 이중섭의 서귀포(西歸浦)생활은 가난.고독과의 싸움이었지만 예술에 대한 열 정만은 뜨겁게 타올랐다.
바닷가 아이들과 꽃게 그림,한라산 갈가마귀를 그린 까마귀 그림들은 서귀포 시절의 귀중한 수확이었다.그러나 이중섭의 서귀포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11개월만에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다시 부산으로 나와야 했고,부인과 아이들을 일본으 로 떠나보내는절박한 상황이 계속되면서 궁핍과 고독의 나락(奈落)으로 빠져들었다. 이중섭이 저 세상으로 간지 40년.그의 서귀포 시절을 기념하는 작은 「선물」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다.서귀포시는 올 상반기중으로 그가 살았던 집 부근에 「이중섭거리」를 지정한다.한 천재화가에 관한 기억을 오래 간직하려는 서귀포 사람들의작은 정성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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