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금융위, 칼을 뺐으면 무라도 베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미국 가정주부치고 마사 스튜어트를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듣는다. ‘살림의 달인’으로 불리는 그는 미국 아줌마의 우상이다. 마사가 가르쳐준 대로 요리하고, 집 안을 꾸미며, 심지어 벽지까지 같은 색으로 바꾼다. 1999년 그가 설립한 ‘마사 스튜어트 리빙 옴니 미디어(MSOL)’는 뉴욕 증권시장에 상장한 뒤 시가총액 10억 달러 그룹으로 컸다. 살림만 잘해도 대기업 오너가 될 수 있다는 꿈과 자긍심을 미국 아줌마들에게 심어줬다.

잘나가던 마사는 2001년 딱 한 번 실수를 저질렀다. 주식에 손댄 그는 투자한 생명공학회사가 신약 허가를 받지 못했다는 정보를 미리 빼냈다. 주가가 추락하기 전에 재빨리 주식을 팔아치운 것까지는 좋았다.

‘까딱했으면 4만5000달러를 날릴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에게 법원 출두명령서가 날아들었다. 내부정보를 이용해 주식을 거래했다는 혐의였다. 2004년까지 끈 재판에서 그는 결국 징역 5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20만 달러에 가까운 벌금은 덤이었다. 고작 4만5000달러를 ‘덜 손해 본’ 대가였다. 복역 후 그는 MSOL 회장 겸 최고경영자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장면을 바꿔 2006년 11월 한국. 2000원대였던 UC아이콜스라는 코스닥 상장회사의 주가가 갑자기 뜨기 시작했다. 인수합병(M&A)의 귀재라는 새 경영진이 들어오면서부터다. 이듬해 4월 이 회사 주가는 2만8800원으로 5개월 반 만에 11배가 됐다. ‘대박’ 꿈에 부푼 개미투자자가 몰린 건 당연했다. 투자자에게 주식 살 돈을 빌려주느라 정신없었던 증권사도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불과 두 달 뒤 두 명의 경영진이 수백억원의 회사 돈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됐다. 곧이어 경영진의 주가 조작 혐의도 드러났다. ‘묻지마’ 팔자가 쏟아지자 UC아이콜스 주가는 13일 연속 하한가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결국 이 회사는 지난 4월 증시에서 퇴출당했다. 한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구속됐던 경영진 중 한 명이 올 초 집행유예로 풀려나더니 UC아이콜스가 인수한 또 다른 코스닥 회사의 대표이사로 버젓이 복귀했다. 이 회사 역시 지난 4월 퇴출 위기에 몰렸으나 신출귀몰한 몇 차례 증자로 기사회생했다.

미국에선 불공정 거래를 했다가 걸리면 패가망신을 각오해야 한다. 집행유예나 보석도 받기 힘들다. 불공정 거래로 챙긴 돈은 물론이고, 서너 배의 벌금도 물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선 반대다. 초범은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재범이라도 챙긴 돈의 절반 정도만 토해내면 징역형을 면할 때가 많다.

이러니 횡령이나 주가 조작 사고가 해마다 급증한다. 올 들어 코스닥 상장회사의 횡령사고는 44건에 달했다. 이대로 가면 지난해(50건)의 두 배는 시간문제다. ‘인천에 배 들어온다’는 유의 거창한 계약을 발표했다가 ‘아니면 말고’ 식으로 취소한 엉터리 공시도 62건이다. 지난해 이후 매년 두 배 가까이 늘고 있다. 공시를 믿고 투자한 사람만 바보가 된 셈이다.

더 한심한 건 횡령이나 주가 조작으로 껍데기만 남은 회사도 퇴출이 안 된다는 거다. 이름만 바꾼 뒤 또 다른 주가 조작에 ‘재활용’되기 일쑤다. 어떻게든 돈을 끌어와 자본금만 불려놓으면 퇴출 대상에서 빼주는 제도의 허점 때문이다. 심지어 사채업자와 짜고 장부상으로만 증자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해 이후 증자 공시가 확 늘어난 까닭이다.

정부라고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 금융위원회와 증권선물거래소는 최근 껍데기뿐인 회사가 편법 증자로 퇴출을 피해가지 못하도록 상장·퇴출 제도를 손보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지난해 초부터 옛 금융감독위원회가 ‘검토’해온 방안이다. 1년이 다 가도록 외부 용역보고서만 만지작거린 사이 이미 수많은 투자자가 꾼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희생됐다. 금융위, 칼을 빼들었으면 이젠 무라도 베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정경민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