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신생아에도 투표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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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난 1일 오후 베를린의 독일 연방의회 본회의장. 여야 의원들이 공동으로 태어날 때부터 투표권을 주자는 법안을 상정하자 방청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날이 만우절이어서 국회의원들의 농담이거나 유머라고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띤 토론은 실제상황(?)이었다.

제안설명에 나선 집권 사민당(SPD)의 롤프 슈퇴켈 의원은 "모든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면서 "국민은 성인들만이 아니라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유소년 인구도 포함돼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기에 1인 1표의 권리를 태어날 때부터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자 여야 의석 곳곳에서 박수갈채도 나왔다.

당초 이 법안은 자유민주당(FDP)의 클라우스 하우프트 의원이 발의했다. 그는 "신생아를 포함해 유소년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되 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부모가 대신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동료의원들을 설득했다.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이 성인들 위주로 법과 정치를 이끌고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 같은 제안에 볼프강 티어제(사민당)국회의장, 안트예 폴머(녹색당)국회부의장, 법학자인 로만 헤어촉(기민련.CDU)전 대통령 등이 "일리가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초당적인 찬성 분위기에 법안은 입법제안 정족수 31명을 거뜬히 채우고 연방본회의장에서 토론에 부쳐진 것이다.

그러나 토론에선 반대 목소리가 더 거셌다. 다니엘 바르(FDP)의원은 "부모가 아이를 대신해 투표한다면 그 아이의 뜻이 투표에 잘 반영되겠느냐"고 꼬집었다.

이날 토론은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끝을 맺었다. 그러나 유럽연합(EU) 확대, 이라크 파병 문제 등 산적한 현안에도 불구하고 신생아의 참정권까지 챙기는 독일 의회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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