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일부, 정치권과 연루 정연주 사수하는 건 위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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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사진) 사장 퇴진 문제를 둘러싼 KBS의 내홍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촛불시위대의 행렬이 KBS로 향하는 가운데 KBS가 정치투쟁의 핵심으로까지 떠오르는 형국이다.

정 사장이 검찰 소환에 불응한 17일 KBS 이사회는 최근 ‘9시 뉴스’의 ‘오보’와 관련해 이일화 보도본부장 징계를 추진했으나 무산됐다. 사장 퇴진운동을 앞장서 벌이다가 촛불시위대로부터 비판받은 KBS 노조는 이날 정치권과 사내 정치세력의 연계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KBS기자협회·PD협회·경영인협회 등이 노조의 사장 퇴진운동을 반대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중견 기자와 프로듀서들은 사장 퇴진론에 힘을 싣는 등 내부의 분열 양상이 심해지고 있다.

◇KBS 이사회, 보도본부장 인책 불발=KBS 이사회(이사장 유재천)는 17일 오후 3시 임시 이사회를 열고 이일화 보도본부장에 대한 해임권고안 의결을 추진했으나 무산됐다. 지난달 15일과 26일 ‘9시 뉴스’의 이사회 관련 ‘오보’에 대한 문책성 징계를 추진하려 했으나 가능한 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자는 ‘신중론’을 넘지 못한 것.

한 관계자는 “보도본부장 해임권고가 과연 의결 사항인가를 놓고 논란이 일어 표결에 부쳤고, 찬성이 재적 과반을 넘지 못해 안건 상정에 실패했다”며 “이사회가 최고의결기구답게 적극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무력화됐다”고 말했다. 이사회의 보도본부장 해임권고안은 법적 효력은 없지만 의결될 경우 최근 김홍 전 부사장의 사퇴에 이어 KBS 상층부에 강한 압박 요인이 될 것으로 관측돼 왔다. 반면 KBS 기자협회와 PD협회 등은 이날 이사회를 전후해 “이사회는 정치적 월권 행위를 중단하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도 성명을 내고 “보도본부장 해임권고안은 이사회의 존재가치 부정”이라며 “이사회의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보도본부 중견 기자들로 이뤄진 ‘KBS의 미래를 생각하는 중견 기자들의 모임’(가칭)은 13일 ‘KBS 뉴스가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보도본부장에게, 공정성과 균형성이라는 공영방송 뉴스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갈 것을 엄중히 촉구”한 바 있다.

◇“민주당 KBS 촛불시위서 빠져라”=KBS 노조(위원장 박승규)는 17일 KBS 촛불시위에 정치권(통합민주당)과 사내 정치세력이 연루됐다며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노조는 ‘민주당은 KBS 촛불시위에서 빠져라’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시민들의 순수한 공영방송 지키기 촛불집회에는 감사를 보내지만 이에 통합민주당이 참여하는 것에는 분명하게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이는 정치권이 개입할 사안이 아니며, 특히 (구여권에서 낙하산 인사를 했던) 통합민주당의 일부 인사가 공영방송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연주 사수에 나서는 것은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노조는 또 KBS 기자협회·PD협회는 물론이고 언론노조·촛불시위대로부터 정 사장 퇴진운동이 비판받고 있는 것과 관련, “KBS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자들은 낙하산 정연주에 반대하는 대다수 조합원이 아니라, 사내 구성원들이 정치PD·정치기자로 규정짓는 일부 세력”이라며 “통합민주당을 촛불집회에 끌어들이려는 사내 일부 세력이 촛불집회의 순수한 정신을 흐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깊어지는 노·노 갈등=정 사장의 거취 문제는 노사 대립을 넘어 노·노 대립의 골을 깊게 하고 있다. 노조의 정 사장 퇴진운동이 사내외에서 비판받는 가운데 중견 기자와 프로듀서 사이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KBS 기자협회의 한 관계자는 이날 “정 사장 퇴진이 공영방송 사수의 핵심 과제인가를 놓고 회원들을 대상으로 내부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보도본부 중견 기자들이 모임을 결성한 데 이어 중견 예능·편성 프로듀서들 역시 협회의 공식적 입장과 다른 목소리를 내며 집단화하고 있어 KBS 내부 갈등은 좀처럼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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