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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천하`라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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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여성골프의 대명사로 통하는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에서 한국 낭자군의 선전이 연일 화제란다. 톱 10 가운데 늘 예닐곱명은 한국계다. 최근 열린 크래프트 나비스코챔피언십에서는 1위, 2위, 4위로 최상위권을 점령했다. 태권도 같은 국기도 아니고 달리기처럼 국민운동종목도 아닌데, 난다긴다하는 프로골퍼들의 세계에서 10대 소녀들까지 기염을 토하고 있으니 본토박이들의 간담이 서늘하게도 생겼다.

골수 남성들의 텃밭인 정계에도 여성이 간판으로 등장했다. 16대 국회를 좌지우지한 한나라당 대표로 박근혜 의원이 선출됐다. 원내 제2당인 민주당도 대표를 `식물인간화`하면서까지 추미애 의원을 선대위원장으로 `모셨다`.

여기저기서 `여인 천하`라는 말이 터져 나온다. 성급한 이들은 그간 여성에게 주었던 여러 혜택을 이제 거둬들여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가장 입성하기 어려웠던 정치권력을 여성이 좌지우지할 판인데 무슨 사회적 약자냐는 뜻일 게다.

하기야 랭킹 1~3위 헤비급 정당의 대변인은 일찌감치 여성들이 싹쓸이했다. 17대 총선에는 사상 가장 많은 여성이 각 정당의 공천을 따내 지난달 24일까지 4개 주요 정당 지역구 여성후보는 16대의 3.2%를 훌쩍 넘어 4.5%다. 56석이 걸린 비례대표는 절반이 떼논 당상에, 얼굴인 `1번`은 아예 여성 차지다. 게다가 17대 총선 유권자 수는 여성이 남성보다 61만명이나 더 많단다. 이런 판에 막강한 두 정당을 여성이 꿰차고 앉았으니 딴은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한나라당이 예전의 인기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결코 朴의원에게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朴대표가 한나라당을 뛰쳐나가 신당을 창당했을 때를 회상해 보라. 朴대표도 한 인터뷰에서 "이번에 한나라당은 완전히 바닥까지 왔다. 이런 위기가 없었다. 제가 선택받았다"고 했다.

탄핵정국을 주도하고, 한나라당과 손잡았으나 몰아친 역풍으로 풍전등화 신세가 되지 않았던들 민주당이 냉큼 실질적 대표격으로 秋의원에게 자리를 넘겨줄 리 없다. 秋의원이 수락 기자회견에서 말했듯 "민심도 떠나고 천심도 잃은 절박한 상황"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치권의 여성 중용은 선심용.구색용을 거쳐 이제 땜질용으로 바뀌고 있다. 노태우 정권이 여성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정무 제2장관실을 만든 것은 장관직 한 자리를 여성몫으로 고정시켜 주려는 선심에서였다. 문민정부가 이를 넘어 다른 부처까지 확대하며 단명한 여성장관들을 줄줄이 양산했던 것은 남녀의 조화를 염두에 둔 구색 갖추기였다. 비록 불발에 그치긴 했지만 국민의 정부가 내놓은 `여성총리`카드는 국면전환용의 효시였다. 임기 후반기, 힘도 빠지고 인기도 바닥이었던 국민의 정부는 활로를 열 땜질용이 절실했었다.

상황타개나 국면전환을 위한 땜질은 여성도 있는 듯해야 보기 좋다는 식의 구색 갖추기보다야 낫기는 하다. 구색용이 시혜를 베푸는 선심용보다 낫고, 아예 여성은 안중에도 없는 것보다야 선심이라도 베푸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그러나 땜질이란 일시적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조직의 속성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복원력이 강하다. 제 아무리 출중한 지도자라도 구조나 체질을 단시일에 바꿔놓기란 불가능하다.

거대 야당이 내민 두 여성 간판의 의미는 이제 여성에게도 본토박이인 그들과 비슷한 능력이 있음을 마지못해 인정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을 함께 향유하거나, 나아가 여성이 권력의 본산이 되는 것은 아직도 먼 먼 얘기다. 정당은 LPGA가 아니다.

홍은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