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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인터뷰>공노명 외무장관에 듣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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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장관치고 한가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공노명(孔魯明.63)외무장관만큼 요즘 바쁜 장관도 없는 것 같다.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 비자금 파문으로 온통 세상이 떠들썩한 가운데서도 대일 망언대책이다,유엔 안보리 진출이다,장쩌민(江澤民) 중국국가주석방한이다 해서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외무부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줄 알았던 盧씨 비자금 파문이 스위스 비밀계좌 의혹으로 번지면서 그 유탄까지 날아와 외무부를 괴롭히고 있는 실정이다.
안보리 진출처럼 광(光)나는 일만 있 는 것은 아니다.대일 망언대책처럼 하루에도 몇번씩 구수회의를 열어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골치아픈 일이 많다.그러다 보니 오전7시에 공관을 나서 저녁이나 밤 늦게 퇴근할 때까지 잠시도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다는 하소연도 나올 법하다.
바쁜 틈을 쪼개 중앙일보 월요인터뷰에 응한 孔장관을 배명복.
김성진 두 기자가 만나 최근 외무부 돌아가는 얘기를 들어봤다.
우선 현안으로 불거져 있는 한-일관계로 서두를 꺼냈다.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총리에 이은 에토 다카미(江藤隆美)총무청장관의 망언으로 극도로 경색된 양국관계를 풀어가야 할 조타수 역을 맡고 있는 孔장관의 생각을 본인 목소리를 통 해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가 있기 전날 그는 야마시타 신타로(山下新太郎)주한일본대사를 불러들여 에토장관 망언에 대한 일본정부의 「현명한 결단」과 「적절한 조치」를 촉구했다.사실상 해임요구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조치는 「엄중주의」로 끝났다.그대신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외상을 한국에 보내 해명하고,사과하는 선에서 에토장관 망언파문을 수습한다는 방침을 정했다.孔장관과의 인터뷰는 일본 정부의 이같은 방침이 알려진 직후였다.
일본 정부가 결정한 수습방향에 대한 의견부터 들어봤다.
『고노외상이 와서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한들 적절한 「성의표시」가 없으면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언론은 어떻게 생각해요.』孔장관은 에토장관 해임을 일본 정부측이 보여야 할 최소한의 성의 표시로 생각하는 듯했다.그 정도 성의 표시없이 한국국민을 납득시키기는 어려울 거라는 뜻으로 맞장구를 쳐주자 기다렸다는듯그는 말을 이었다.
『정부판단도 그렇습니다.다른 사람도 아닌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각료라는 사람이 정부방침에 어긋나는 발언을 제멋대로 했어요.그리고 발언이 문제되자 취소했다지만 취소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느냐 말입니다.』 孔장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고노외상의 방한 자체에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얘기하는 겁니다.적절한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는 거지요.
』 뻔한 질문이지만 적절한 조치가 에토장관 「경질」을 의미하는지 물었다.직답은 아니었지만 孔장관 대답의 의미는 명료했다.
『과거에는 그런 얘기를 한 각료들이 경질됐어요.』 오사카(大阪) 아.태경제협력체(APEC)정상회담 전날인 오는 18일로 예정된 한-일정상회담의 성사 가능성 문제로 얘기를 끌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원래 고노외상은 이정상회담의 정지작업을 위해 오기로 돼있었어요.그러나 고노외상이이런 상황에서 와봤자 아무런 효과를 갖지 못한다면 정상회담이 어떻게 성사될 수 있겠어요.어려울 것 같은데… 어때요.』또 언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다.
중앙일보와의 인터뷰가 끝난 뒤 孔장관은 장관실로 찾아온 야마시타 대사를 만났다.야마시타 대사가 고노외상의 파견을 희망하는일본 정부 방침을 전달했으나 孔장관의 대답은 한마디로 『노 생큐』였다.올테면 에토장관의 옷을 벗기고 오라는 얘기다.일본 정부의 사태 수습방침을 정면으로 거부한 셈이다.孔장관으로서는 초강수를 던지는 순간이었고,한-일관계가 급속 냉각되는 순간이었다.孔장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통이다.
서울대법대에 적을 두고 있던 1958년 그는 통역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주사시험을 거쳐 외무부에 들어왔다.처음 맡은 일이한일국교정상화 교섭실무였다.그후 일본전담부서인 동북아과장과 아주국장을 지냈다.초대 주소련대사를 거쳐 주일대사 로 있던 지난해 12월 외무장관으로 발탁됐다.통역장교 출신답게 영어도 수준급이지만 일어는 통역이 따로 필요없을 정도다.
누구보다 일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친일적이라는 오해도 가끔 받는다.그런 孔장관이 일본에 대해 이 정도 강수를 둘 때는 나름대로 특별한 각오를 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이 자꾸 되풀이되면 한-일간의 신뢰관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양국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해서는 공통의 역사인식이 전제조건이 돼야 합니다.』 이번 기회에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꿔놓고 말겠다는 결의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국내를 벌집 쑤신듯 시끄럽게 하고 있는 盧씨 비자금 파문과 스위스 비밀계좌 조사 문제로 화제가 옮아갔다.이미 미국 검찰당국이 盧씨의 딸 소영(素英)씨 수사과정에서 상당한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한국정부가 요청할 경우 협조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히고 있는데도 진상을 밝히려는 외무부의 자세가너무 소극적인 게 아니냐는 일부의 지적을 孔장관에게 전했다.
『미 검찰의 관계서류는 작년부터 이미 우리나라 검찰 손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이 문제는 외무부 차원에서 따로자체조사한다든가 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사법당국에서수사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알아보고,판 단해야지 덮어놓고 우리보고 외국정부에 요청하라고 한다고 해서 됩니까.』 답답하다는 투로 대답하면서도 孔장관은 『필요한 사항에 대해선 외무부로서도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노소영계좌' 규명최선 유엔 안보리 진출이라는 외교적 성과가 당연히 화제에 올랐다.인터뷰가 있기 전날 한국은 유엔 회원국들의 압도적 지지로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선출됐고,孔장관은 외무부 직원들과 칵테일 잔을 들며 성과를 자축했다.저녁 때는 유엔국(局) 담당자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만찬까지 베풀었다.
『우리가 한 각고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지리(地利)와 인리(人利)가 따라준 결과이기도 하지요.93년 4월 스리랑카 정권이 바뀌면서 스리랑카가 안보리 이사국 출마방침을 포기하지 않았습니까.이건 지리지요.또 알 파게라는 스리랑카 유엔대 사가 아주 발이 넓은 사람인데 정권교체로 소환됐어요.이건 인리에 해당됩니다.그 결과 우리가 아시아그룹 단독후보로 추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안보리 진출로 한국의 유엔분담금 부담이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일부의 걱정을 지적했다.분담금과 안보리 진출이 직접적관련은 없지만 우리나라의 경제력에 걸맞게 분담규모를 확대할 필요는 있다는 것이 孔장관의 대답이었다.따라서 앞으로 5년 동안단계적으로 늘려갈 생각이라는 구상을 밝혔다.
우선 자발적 성격의 사업분담금 규모를 금년의 640만달러에서내년엔 1,000만달러로 약 67% 증액하는 것을 시작으로 연차적으로 늘려간다는 구상이다.이와함께 유엔의 평화유지활동(PKO) 분담금도 정규예산분담금의 0.16%를 내는 C그룹에서 0.8%를 내는 B그룹으로 옮겨가도록 할 작정이라는 것이다.
***유엔분담금 점차 늘려 江주석의 방한도 안보리 진출처럼 孔장관이 광을 낼 수 있는 「외교적 사건」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10월 리펑(李鵬)총리가 방한했고,올 4월 차오스(喬石)전인대 상무위원장이 왔어요.그리고 이번에 江주석까지 옴으로써 1년 사이에 중국의 3대 지도자가 모두 방한하는 셈이 됐습니다.이는 한국에 대한 중국의 관심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孔장관은 『중국은 자국의 정치.안보적 측면에서주변정세의 안정을 바라고 있다』면서 『이런 이유로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유지를 기본정책으로 추구하고 있고,장기적으로 한-중간의 정치.안보적 상호협력도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피력했다. 대북(對北)정책으로 화제를 돌렸다.대북정책에 일관성이없다는 여론의 비판에 대해 「비교적」이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본질적으로는 일관성이 있다』는게 孔장관의 반박이었다.
『정부의 기본입장은 남북문제를 평화적인 대화로 풀어나간다는 것입니다.이런 입장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잘 안되니까 이런 것도해보고 저런 것도 해보고 하는 과정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비칠 수는 있겠지요.』기본적으로는 기조가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주장이다.
***외무.통상 통합 바람직 최근에 중요성이 부쩍 높아지고 있는 통상외교 문제로 얘기가 넘어갔다.이 부분에 대해 孔장관은비교적 솔직한 입장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지론이라면서 정부조직법상의 통상교섭권과 140여개 재외공관망을 갖고 있는 외무부,통상전문지식을 갖고 있는 통상산업부를 외무통상부로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孔장관은 지난 국정감사에서도 개인적 소견임을 전제로 이런 의견을 제시했었다.그러나 정부내 컨센서스가 이뤄져야 하는 문제인 만큼 쉽지않은 문제고,따라서 현재의 조직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족을 잊지 않았다.
83년 5월 중국 민항기 사건은 孔장관의 존재를 국민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중국민항 총국장과 중국승객 송환협상을 벌이면서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 얼굴이 알려졌다.『한-중관계의 레일을 까는 회담이 됐다』고 회상하는 그는 지금도 이 회담을 가장기억에 남는 협상의 하나로 꼽고 있다.
한-일 수교교섭,이대용 주월남공사 석방교섭,중국민항기 송환교섭,한-소 수교교섭등 수많은 실무협상 경험으로 다져진 孔장관의별명은 「니고시에이터」(협상가)다.
정부종합청사 8층 외무장관 집무실에 걸려 있는 중국시인 두목(杜牧)의 시 한구절은 직업외교관료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의풍상을 말해주는듯 하다.
「勝敗兵家事不期/包羞忍恥是男兒」(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지상사가 아닌가/부끄러움을 안고 치욕을 참아내는 자야말로 남아다).
▶32년2월 함북명천 출생 ▶51년 경기중학 졸업,서울대법대입학(61년 졸업) ▶58년 외무부 입부 ▶66년 동북아과장 ▶77년 아주국장 ▶79년 주 카이로총영사 ▶80년 정무차관보▶83년 주 브라질대사 ▶86년 주 뉴욕총영사 ▶90년 주 소련대사 ▶92년 외교안보연구원장 ▶93년 주 일본대사 ▶94년12월 외무장관 ▶부인 한명숙(韓明淑)씨와 2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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