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즐거운천자문] 다큐멘터리 ‘들개의 역습’ 인간 무관심 폐해 보여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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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어린이날 선물로 무엇이 좋을까. 장난감·지갑·티셔츠·모자·시계까지 받아보았지만 지금 그것들은 어디에도 없다. 영혼의 서랍 속에 남아 있는 건 역시 한 권의 책이다. 그중에서도 비타민 같은 존재가 바로 『사랑의 선물』이었다.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짓고 퍼뜨린 소파 방정환 선생이 외국 동화를 번안해 엮은 책이다.

단편 중에 ‘이상한 샘물’이 떠오른다. 가난하지만 평생을 착하게 산 노부부는 자식이 없다. 어느 날 기적의 샘물을 마시고 둘은 20대 신혼이 된다. 소문을 듣고 한밤중에 샘을 찾아가 무작정 마셔댄 성질 고약한 이웃노인은 갓난아기로 변하고 새벽에 그를 발견한 부부는 ‘사랑의 선물’로 여겨 정성껏 키운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지극히 선량한 사람이 됐다.

초등학생들이 연루된 끔찍한 뉴스를 접하고 부모와 선생님들 마음이 어땠을까.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까지 황량해졌을까.” 참담해진 정신을 수습하고 TV를 보니 마침 이어지는 프로가 ‘환경스페셜’이다. 부제는 ‘현장추적 들개의 역습’. 제주도에서 벌어진 일인데 간추리면 버림받은 개들이 늑대처럼 변해 축사를 공격했다는 이야기다.

전문가의 인터뷰는 충격적이다. 개들이 들판을 몰려다니는 이유가 단순히 먹이를 찾으려는 게 아니란다. 물려 죽은 노루 및 송아지의 사체를 유심히 관찰한 결과다. 배가 고파서라면 이해가 될 텐데 살상을 놀이삼아 한다니 아무리 들개라지만 동정이 안 간다.

사건이 벌어지면 원인을 찾고 재발을 막는 게 순서다. 들개의 역습은 인간의 무관심이 빚은 필연적 결과라는 게 제작진의 진단이다. 유기견이 잃어버린 야성을 회복하고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뭉치는 순간 무시무시한 피의 잔치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문제아를 키우는 건 결국 문제가정, 문제학교, 문제사회다. ‘초등학생들이 뭘 안다고’라며 혀를 찰 일이 아니다. 과거 우리가 다닌 교실과 운동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한번 어두운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보자. 어른들은 참 자신의 불편한 과거를 잘도 잊어버린다. 부모· 교사·어른들이 외면 혹은 방관하는 사이에 아이들은 위험한 일탈을 꿈꾸고 실행한다.

개를 사랑한다면 개를 잘 키워야 한다. 사랑과 무관심은 둘 다 부메랑이다. 전자는 보은이고 후자는 보복이다. 입맛을 다시면서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개가 짖거나 무는 건 당연한 생존본능이다. 먹여주고 입혀준 걸로 도리를 다했다는 주장도 억지다.

어제가 어린이날이었고 모레는 어버이날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자식농사에도 해당되는 금언이다. 모내기할 때 잘 심어주고 김매기 할 때 잘 뽑아주어야 한다. 낳기만 하고 저절로 잘 자라주기를 바란다면 버림받은 아이들의 역습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주철환 OBS 경인TV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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