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쌀 지원 요청하면 핵문제와 연계 않고 추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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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신고를 둘러싼 북·미 간 협상이 급물살을 타면서 정부의 남북 관계 기조가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새 정부 취임 후 지금까지의 무대응 기조에서 벗어나 긍정적 시그널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2일 기자간담회에서 “남북 간 대화를 위해 북한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방을 중지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호응하면 언제든지 우리 생각을 다 말할 수 있는데 북한이 이를 공개 거부해 (우리) 생각을 (다) 밝힐 수가 없다”고 여운을 뒀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비핵·개방·3000 구상’에 대해서도 “북한이 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서 반대하고 있지만 앞으로 대화를 통해 진정한 의도를 듣고 나면 오해가 불식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북 쌀 지원과 같은 인도적 지원에 대해선 “일정 규모 이상일 경우 북한도 인도적 분야에서 협력해 줘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지만 “북한이 요청하면 핵 문제와 연계하지 않고 추진한다는 게 정부의 기본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문태영 외교부 대변인도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정부는 인도적 차원의 대북 지원에서 인권 개선, 정치 개혁과 같은 전제 조건을 내세운 바 없다”며 “북한이 요청하면 여타 사항과 연계하지 않고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정부 당국자들의 이날 발언들은 대남 비방에 대한 ‘경고’와 대북 쌀 지원에 대한 ‘당근’이 동시에 들어 있다는 점에서 양면적이다. 비방 중지 요구엔 청와대의 불편한 심기가 담긴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비방 중지나 조건을 달지 않은 쌀 지원 검토 모두 남북 간 대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대북 쌀 지원이 되려면 남북 간 대화 재개는 필수적이다. 이날 고위 당국자는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베이징 올림픽 공동응원단 파견 문제를 언급하며 “남북 대화가 열리지 않아 이를 추진할 방법이 없어 안타깝다”고도 말했다.

이런 태도는 한·미 정상회담 이전 북한의 원색적 비방에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북핵 연계론을 강조하며 남북 관계에 소극적이었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래서 정부가 북핵 신고 문제 진전에 이어 향후 북·미 관계의 개선 조짐까지 보이자 이에 대비해 남북 간 대화 국면을 조성하기 위한 사전 포석에 들어갔다는 해석이 나온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는 전날 강연에서 북핵 신고 문제가 타결되면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에 나서고, 대북 쌀 지원을 할 의향이 있음을 공개하기도 했다.

물론 정부 고위 당국자는 이날 대북 인도적 지원을 언급하며 ‘북한의 선(先)요청’을 강조했다. 북한이 이행을 요구하는 6·15 선언에 대해서도 “(선언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답방하게 돼 있었는데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반도 주변 상황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겠지만 먼저 주겠다고 나서거나 북한의 주장을 무조건 참아온 지난 정부의 대북 대화 접근법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메시지도 잊지 않고 강조한 셈이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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