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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시대의 바둑 ⑤표류하는 바둑 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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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심판 없이도 시합할 수 있다고 자랑해 온 바둑이 공식룰 지정을 놓고 난항을 겪고 있다. 중국룰, 일본룰, 응씨룰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어 앞으로는 선수들의 룰과 일반 팬의 룰이 서로 다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 사진은 지난해 수원에서 열린 2회 세계아마대회 모습.

10월 베이징에서 열리는 제1회 세계마인드스포츠게임(International Mind Sport Games)은 어떤 바둑룰을 선택할 것인가. 이를 결정하기 위해 16~18일 베이징에서 ‘바둑 룰 회의’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이 회의에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가한 남치형(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는 “구조적으로는 일본룰이 공식 룰로 정해져야 맞지만 중국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대만의 잉창치 바둑재단이 IMSG의 최대 스폰서로 나섰기 때문에 상황은 더 골치아파졌다”고 말한다.

바둑룰엔 바둑에 관한 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동아시아 3국, 즉 한국·중국·일본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바둑 종주국을 자처하는 중국과 일본의 자존심 싸움이고 여기에 대만의 응씨룰이 가세한 형국이다(한국은 해방 이후 고유의 ‘순장바둑’을 포기했고, 현재는 일본룰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중국룰, 일본룰, 응씨룰은 계가법이 다르다(승부 결과는 똑같다). 각자의 계가법은 오랜 역사를 지닌 탓에 쉽게 바꿀 수 없다. 예를 들어 한국 팬들에게 중국의 복잡한 계가법을 설명하고 가르치기란 바둑을 새로 배우기보다 어렵다. 문제는 선수들끼리의 대회에서 공식룰을 어느 것으로 하느냐의 문제인데 10월 IMSG에서 채택되는 룰이 2010년 아시안게임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각국의 헤게모니 싸움은 암중으로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일본룰=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룰과 같다. 대국이 끝나면 사석(포로)과 집을 합산해 승자를 결정한다. 가장 간단하고 대중적인 계가법. 그러나 ‘귀곡사’ 같은 특별한 규정을 두어야 하는 등 많은 설명(규정집)이 필요하다.

▶중국룰=대국이 끝나면 누가 바둑판 위에 바둑돌을 더 많이 올려놨느냐, 즉 생존자가 누가 많으냐로 승부를 가린다. 따라서 포로는 필요없다(한국이나 일본에서 대국할 때 중국 기사들이 무심코 사석을 상대 바둑통에 넣었다가 계가 사고가 난 경우가 많다). 개념은 매우 간단하고 바둑 원리도 쉽게 설명되지만 막상 계가가 복잡해 중국에서 국제대회를 하면 계가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따로 필요하다.

▶응씨룰=대만 재벌 잉창치(應昌基)가 30년 연구 끝에 완성했다는 바둑룰. 항상 180개의 돌을 갖고 시작해야 하고 대국이 끝나면 남은 돌로 자기 집을 메워 계산한다. 똑같이 180개의 돌을 준비해야 하기에 여기에 맞는 바둑통이 특별히 제작돼 있다. 중국룰보다 더 복잡해 한국과 일본의 입장에선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룰. 그러나 잉창치 바둑재단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전 세계에서 많은 바둑대회를 후원하며 이 룰을 전파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다(미국이나 뉴질랜드도 그들만의 논리적인 룰을 만들고 있다. 미국바둑협회가 만든 룰이 최근 영국에서 실험돼 이론가들 사이에서 호평받고 있다고 한다).

핵심을 보면 중국·응씨룰은 ‘논리’에서 앞서고, 일본·한국 룰은 ‘대중성’에서 앞선다. 오랜 세월 이 싸움은 평행선을 그어왔기에 원칙적인 타협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베이징 대회의 공식 룰은 정해져야 한다.

일본은 국제바둑연맹(IGF)이 국제 올림픽 위원회나 IMSA 측이 인정하는 유일한 공식 기구인 만큼 IGF가 제출한 일본룰이 공식 룰이 돼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큰 대회를 치르려면 돈이 들고 당연히 스폰서의 입김이 작용하게 된다. 더구나 10월 대회를 주관하는 IMSA라는 단체는 유럽인들이 주축이라 골머리 아픈 바둑 룰보다는 돈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베이징 룰 회의의 스폰서도 잉창치 바둑재단이다. 그 영향을 받은 중국 측은 이번에 중국기원 원장인 화이강이 만든 새로운 룰을 제시할 예정이라 하는데 이를 놓고 일본 측은 “그건 응씨룰에 일본 덤을 붙여 만든 억지”라고 미리 엄포를 놓고 있다. 어떤 룰이 정해져도 쉽게 승복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자칫 대회 자체가 파행으로 흐를 위험성마저 엿보인다. 일각의 주장대로 한국마저 바둑 최강국임을 내세워 이 싸움에 끼어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바둑인들이 현명하다면 사실은 룰에 더 이상 집착해선 안 된다. 어떤 룰이든지 계산(승부 결과)은 한 집도 틀리지 않고 똑같이 나오지 않는가. 룰을 놓고 계속 싸운다면 아시안게임이든 뭐든 우습게 되고 만다. 중국의 논리가 옳다는 것을 세계가 인정하되 실제 계가는 바둑 세계화를 위해 쉬운 일본 쪽을 선택한다든지 융통성을 발휘할 때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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