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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롱고스의 꿈과 무비자 협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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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구온난화는 몽골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평소 같으면 영하의 한기가 남아 있어야 할 4월 중순이지만 수도 울란바토르는 완연한 봄 날씨다. 한낮에는 약간 덥다는 느낌마저 든다. 때 없이 불어오는 황토색 먼지 바람만 아니라면 서울의 봄 날씨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부동산 개발 열기 탓에 더욱 덥게 느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 울란바토르는 거대한 공사판이다. 시내 곳곳에 빌딩과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올라가고 있다. 부동산 가격은 최근 1년 새 배 이상 올랐다. 한국이나 중국 업체들이 짓고 있는 고급 아파트의 경우 평당 분양가가 400만~500만원이 넘는다. 1인당 국민소득 1500달러인 몽골인들로서는 결코 싼 게 아닌데도 없어서 못 판다. 돈이 몰리는 게 어떤 것인지 실감이 난다.

울란바토르의 개발 붐은 말할 것도 없이 국제원자재 가격 급등과 자원 확보 경쟁 때문이다. 몽골은 세계 10위의 자원부국이다. 석탄·구리·몰리브덴·우라늄과 금이 초원과 사막 곳곳에 널려 있다. 특히 각각 200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명된 고비사막의 타반톨고이 유연탄 광산과 오유톨고이 구리·금 광산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각국에서 거액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금덩이를 깔고 앉아 굶고 있던 처지가 자원 전쟁 시대를 맞아 졸지에 바뀌고 있는 것이다.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강대국일수록 러브콜에 적극적이다. 수억 달러에 달하는 공적개발원조(ODA)와 차관 제공, 부채 탕감 등의 사탕을 제시하며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자칫하면 밀려날지 모른다는 조바심 속에 너도나도 숟가락을 들고 달려드는 형국이다. 이렇다 보니 몽골 정부도 배짱이다. 자원민족주의 바람을 타고 지분의 51% 이상을 몽골 정부가 소유하는 방향으로 광물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한국에까지 차례가 올지 의심스럽다.

그동안 한국이 몽골에 제공한 ODA는 2000만 달러에 불과하다. 1991년부터 16년간 한다고 한 게 그 정도다. 그렇다고 다른 강대국들처럼 수억 달러씩 뭉칫돈을 찔러줄 수도 없는 형편이다. 국가 차원에서 특단의 방책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나오는 아이디어가 한국-몽골 간 무비자 협정이다.

한국과 몽골의 인종적·역사적·문화적 동질성은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주변 강대국에 대해 느끼는 경계심도 없다. 한류(韓流)가 식고 있다지만 지금도 지구상에서 한류가 가장 맹위를 떨치고 있는 나라가 몽골이다. 몽골에서 영어 다음으로 인기가 높은 외국어는 한국어다. 한국 기업에서 일하거나 한국에 가서 취업하는 것은 몽골 젊은이들의 꿈이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가기 힘든 나라다.

매주 월요일이면 평균 700명의 몽골인이 한국행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새벽부터 울란바토르의 한국 대사관 앞에 장사진을 이룬다. 영하 30도의 한겨울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요구하는 서류가 까다롭고 복잡한 데다 물리적으로도 워낙 힘들다 보니 돈을 쓰러 한국에 가려다가도 포기하는 몽골인이 적지 않다.

현재 한국에 와 있는 몽골인은 3만3000명이다. 그중 약 40%가 불법체류자로 추정되고 있다. 비자의 장벽을 없애 자유롭게 한국에 올 수 있게 하더라도 한국에 체류하게 될 몽골인은 10만 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4900만 인구에 10만 명은 별것 아니다. 하지만 인구 270만 명의 몽골 사회에 한국 체류 몽골인 10만 명이 초래하게 될 정치·경제·문화적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클 수밖에 없다. 자원외교와 북방전략의 실마리를 여기서 풀 수 있다.

몽골인들은 지금도 한국을 ‘솔롱고스(무지개)의 나라’라고 부른다. 무비자 협정을 통해 솔롱고스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자.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비전을 가진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전략적 결단이 바로 이런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오그라진 발상으로 국운 개척은 불가능하다. <울란바토르에서>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