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한국戰기념碑가 뜻하는것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어디선가 지뢰라도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 속에 앞에 선 군인은 뒤에 오는 군인들에게 무언가 경고하는 모습이다.
군인들은 모두 우의를 입고 있다.무거운 느낌이다.고지를 향해전진하고 있지만 흔히 값싼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영웅적 제스처는 없다.
모두 19명,공원 한편으로 세워진 오석으로 만든 벽에 또렷이비친 군인들까지 합치면 모두 38명 이 된다.한반도의 분단을 상징하는 것 같다.틀림없이 한국전쟁을 기념하고 있다.벽에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고 적혀있다.
많은 경우 전쟁기념비는 낭만적 영웅주의에 사로잡히기 쉽다.아예 전쟁 자체를 찬미하든가, 아니면 그 무슨 추상적인 이상(?)을 우상화하기도 한다.
베트남전기념비는 이런 전통적 관념을 정면으로 부정했다.검은색돌로 아무런 곡선도 없이 긴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기념비는 하늘로 향하기를 거부하고 땅속으로 무게를 누르면서 전사한 군인들의이름을 새겨 영원히 그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베트남전을 기념한 것이 아니라 베트남전이라는 비극의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기념비는 다르다.한국전쟁을 부정하지 않는다.그리고 희생자들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던 젊은이들을 한사람 한사람 인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워싱턴의 한국전쟁기념공원이 공허한 영웅주의와 감상적인 패배주의를 모두 거부하고 전쟁의 리얼리티를 포용한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형상화한 것을 보고 참으로 고맙고 다행스럽게 느꼈다.
공교롭게도 한국전기념비제막 얼마전에 미국은 베트남과 국교를 정상화했다.그런데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베트남과의 수교를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베트남전 당시 美국방장관이었던맥나마라도 그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듯 60년대 미국은 중국과월맹을 같은 공산국가라는 점에서 동일세력으로 보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월맹과 싸웠다.그러나 냉전이 종식되 고 공산주의가 몰락한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중국을 견제하려면 베트남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논리가 더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그러니까 미국은 베트남과의 전쟁도,베트남과의 수교도 모두 지정학적 동기,즉 세력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기념비의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클린턴대통령의 초청을받고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워싱턴을 방문,韓美정상회담을 했다. 그런데 백악관은 며칠전부터 더욱 악화돼가는 보스니아문제 때문에 韓美관계에 얼마만큼이나 신경쓸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보스니아문제에서 미국은 마치 서커스의 곡예사와도 같은외교적 제스처를 계속해왔으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미국이 보스니아를 세르비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상군을 동원하면서까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미국의 어떤 이름 모 를 시민이 말한 것처럼 미국 국민의 대다수는 왜 보스니아를 위해 미국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려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세르비아人에 의한 보스니아 회교도들의 학살은 비극이지만,보스니아의 운명이 미국의 국가이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않는한 미국정부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보낸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정당화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렇게 보면 한국은 보스니아와는 달리 아시아 세력균형과 미국의 이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과는 달리 세력균형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고,또 그렇게 하는데 성공한 전쟁이었다는 사실도분명하다.이번에 워싱턴에 세워진 한국전기념공원은 바로 이런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워싱턴을 방문하는 수많은 미국인들은 한국전기념공원을 찾으면서 한국전쟁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그리고 한국은 좋건,싫건 미국인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중요한 경험으로 남게 되었다.우리는 미국과의 이와같은 숙명 적인 관계가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그리고또한번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는 기념비에 새겨진 말의 뜻을 생각해봐야 한다.
〈사회과학원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