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정당학회관찰] 유권자는 ‘메아리’ … 정책 무관심은 후보들 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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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총선을 지켜본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정책 공약을 중요하게 생각할까. 50대 택시기사에게 이번 총선에서 각 정당이 제시한 공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공약요? 대운하 문제 빼고 특별히 공약과 관련된 얘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네요. 그나마 대운하도 뭐가 나쁘고, 뭐가 좋은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서….”

서울 중곡동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40대 남성 유권자도 “어차피 다 선심성 공약일 텐데 뭐 고민할 필요 있나요?”라고 냉소적 답변을 했다.

유권자들은 정당과 후보가 제시한 정책 공약을 잘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흔히들 국민의 수준이 정치 수준이라며 유권자들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이는 유권자의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유권자는 메아리와 같다. 산에서 “야호”라고 외치면 “야호”라고 화답하는 메아리처럼 정당과 후보들이 선거에서 중요하다고 외치는 쟁점에 반응하고 투표한다. 과거 총선에서 정치인들은 지역주의나 대통령 탄핵 등을 선거의 중요 쟁점으로 부각시켰고, 유권자들은 이런 쟁점에 우직하게 화답해 투표했다.

그래서 많은 유권자가 정책에 관심을 갖고, 이를 기준으로 투표하게 하려면 정당과 후보가 서로의 공약을 주요 쟁점으로 삼아 경쟁하는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정당과 후보들은 정책보다는 공천 문제나 당내 권력 다툼 같은 정파적 문제를 중요 쟁점으로 부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권자들이 공약이나 정책에 관심 갖기를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유권자들에게 정책 메아리가 일어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정치인들 스스로 정책을 강조해야 한다. 이들이 바뀌지 않는 한 다른 노력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어렵다.

예를 들어 선거관리위원회는 정책 선거의 구현을 목표로 각 당과 후보들의 공약을 홍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거의 메인 스테이지를 점하고 있는 정치인들이 정책과 상관없는 쟁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상황에서 선관위의 노력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1997년, 영국의 정치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되는 매니페스토를 제시하고, 이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블레어 같은 정치인이 한국에서도 하루빨리 등장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선거법을 개정해 정치인들이 자신의 공약을 유권자에게 알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 주는 것이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의 유문종 사무총장은 “유세 기간이 보름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후보들이 자신들의 공약을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알릴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공약은커녕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에 후보들이 정책에 초점을 맞춰 유권자들과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긴 어렵다. 물론 선거유세 기간을 얼마나 더 늘려야 할지에 대해선 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책선거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제도적 정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최준영 교수 인하대 정치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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