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글로벌아이

삼성-소니와의 별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주말인 23일 오후 삼성의 한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이날 니혼게이자이신문 조간에 ‘소니, 액정패널 샤프로부터 조달’이란 1면 톱기사가 나간 다음이었다. 삼성과 합작으로 만든 ‘S-LCD’로부터 거의 독점으로 액정패널을 공급받던 소니가 한마디로 삼성에 등을 돌린 것이다.

“원래 이런 이야기가 있었나요?”

“글쎄요, 그런 분위기가 좀 있긴 했는데….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확 치고 나올지는 몰랐어요.”

소니는 당분간 삼성과 샤프로부터 동시에 공급받는 체제를 유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소니가 샤프의 대규모 공장에 1000억 엔(약 8800억원)을 투자해 공동 운영하기로 결정한 사실로 볼 때 이는 이혼까지 염두에 둔 별거 선언에 가깝다. 소니는 매년 S-LCD로부터 2조~3조원어치의 물량을 구입해 갔다. 당장이야 별 타격이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2~3년 후면 상황은 확 달라진다.

#2. 전화를 받기 약 한 달 전

평소 알고 지내는 일본의 경제부처 장관 집에 가족 초대를 받았다.

“삼성은 대단해요. 지난해 삼성전자 매출이 1000억 달러(약 95조원)를 넘었다면서요. 전 세계 전기·전자 업체 중 지멘스와 휼렛패커드(HP) 말고는 없다면서요?” 술 한잔 들어간 그는 삼성을 한껏 치켜세웠다. “일본 기업들은 정신 좀 차려야 해요. 서로 따로 놀고 있으니 계속 뒤처지잖아요.”

“그래도 일본에는 소니·마쓰시타(松下)·샤프 같은 뛰어난 기업이 훨씬 많잖아요.”

“다들 힘을 합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래야 삼성을 이길 수 있지. 그런데 삼성이 무슨 특검이다 해서 조사를 받는다면서요?”

#3. “참, 이상해요. 어떻게 그렇게 수익이 날까.”

얼마 전 만난 소니의 한 일본인 간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삼성이 지난달 발표한 지난해 액정TV 실적 이야기다. 상당한 수익을 올린 것으로 나오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S-LCD 공장에서 똑같이 패널을 공급받고 있고, TV에 들어가는 나머지 부품의 가격도 ‘선수’끼리는 다 알아요. 그런데 삼성은 해외시장에서 소니보다 낮은 가격으로 팔고 있거든요. 그럼에도 소니는 액정TV의 수익률이 낮은 반면 삼성은 ‘이상하게도’ 높아요.”

같은 라인에서 생산되는 패널 가격을 다르게 적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불신의 간접 표현이었다. 한때 6%포인트 이상 벌어졌던 삼성과 소니의 액정TV 시장점유율 은 지난해 1%포인트대로 줄었다. 하반기만 따지면 소니가 역전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거 우리가 1위에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삼성에서 ‘별 수’를 다 쓸 텐데….”

결론적으로 세 장면은 다 연결돼 있었다. 소니의 ‘삼성 이탈’은 예견됐던 수순이었던 것이다. 소니로선 불편한 상대가 돼 버린 삼성과 무조건 계속 손잡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샤프는 일본 국내시장에선 압도적 선두지만 해외시장에선 한참 아래다. 해외시장을 주 타깃으로 하는 소니로선 부담 없는 상대를 고른 것이다. 게다가 소니는 S-LCD를 만든 2003년 이후 투자한 것은 대부분 건졌다고 본다. ‘일본 기업 단결’을 물밑에서 재촉하고 있는 경제산업성에도 생색을 낼 수 있었다.

문제는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던 소니를 달래고 같이 나아가자고 할 여력이나 관찰력이 삼성에는 없었다는 점이다. 특검으로 그룹 지휘부는 마비 상태다.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시원찮을 판에 손을 놓고 있으니 당할 수밖에 없었다. 소니로선 특검이 좋은 구실이 됐다. 앞으로 소니는 이혼하지 않고 별거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삼성에 많은 ‘생활비’를 요구할지 모른다. 팽팽 돌아가는 글로벌 기업경쟁에서 낙오되는 건 한 순간이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