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한국현대사>14.그림자조직 美CIC 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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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일본의 패망과 함께 시작된 남한의 해방정국은 미.소의 주도권각축과함께 통일이냐.분단이냐 하는 심각한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해방정국의 양상 속에서 미군정당국과 남한의정치지도자들 뒤에서 활동한 미군방첩대(CIC)는 광복50주년의흐름을 이야기하는데서 빠질수없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美육군정보센터가 발간한 "CIC의 역사:한국점령기간동안"과 중앙일보사의 현대사연구소가 美국립문서보관소에서 최근 입수한 정치지도자들의 인물 파일을 통해 CIC활동의 전모를 2회로 나누어 밝힌다.

<편집자 주> 미군방첩대(CIC:Counter Intelligence Corps)는 해방정국을 이야기할 때 피할수 없는 그림자 조직으로떠오른다.사실상 당시 정국을 주도한 미군정의 촉수로서 미국정부의 한반도내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남한의 정치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감시.감청.연행.연금 등 가능한한 모든 일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CIC가 48년12월 미군철수와 함께 한반도를 떠나기까지 3년동안의 활동상황은 『CIC의 역사:한국점령기간 동안』(59년3월 美육군정보센터 발간)이라는 문서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CIC가 46년8월 작성한 신익희(申翼熙)신문조서는 CIC가해방정국에 얼마나 깊게 관여했었나를 잘 보여주는 문서다.해방 이듬해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는 서울운동장에서 열리는 8월29일 국치일 행사를 미군정의 입법권.행정권의 인 수를 촉구하기위한 대규모 거사로 발전시킬 계획을 은밀히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알아챈 CIC는 거사 전에 신익희를 CIC본부로 데려다 연금상태에 둔 후 신문,계획 전모를 사전에 파악했다. 물론 CIC의 이러한 예방활동과 민족진영의 단결 부족으로 전국적 시위.정부건물 점거 등 대규모 시위계획은 불발로 끝나고말았다.CIC는 사전에 신익희의 집을 압수 수색,종합적인 거사계획서는 물론 각 지역 유지들이 갹출한 성금 명단 및 영수증 등을 모두 압수했다.이때 압수한 문서들은 美국립문서보관소가 지난해 12월 비밀해제한 CIC의 신익희 파일에서 그대로 발견됐다. 당시 신익희가 차지하고 있던 정치적인 비중으로 미뤄 이러한 CIC의 행위는 횡포에 가까운 것이 었으나 입법.행정.사법등 3권을 미군정이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CIC는 무소불위의 정보활동이 가능했다.
이뿐만 아니라 CIC는 모든 주요 남한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전화도청을 실시했다.이 도청은 민간정보통신대(Civil communications Intelligence Group)에서 담당했다.지난해 비밀해제된 문서 가운데 임영신(任 永信)파일은이러한 도청행위가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나를 잘 보여주는 예다.
48년8월9일 민간통신정보그룹이 작성한 도청보고서에 따르면 임영신은 이날 자신이 상공장관에 지명되자 이 사실을 미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알렸다.당시 한국의 민간통신을 맡고 있던 RCA커뮤니케이션스를 통해 전문으로 전달된 이 소식이 같은 시간 한국 CIC의 민간통신정보그룹에도 배달되고 있었다.
또 47년10월10일 민간정보통신대에 의해 작성된 도청문서는작성자 라이트중위.종류 전보,언어 영어,발신자 이원순(李元淳),수신자 뉴욕의 임영신 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내용은 2쪽 분량으로 남한의 민족주의단체들이 특별모임을 갖고 이승만(李承晩)을 국가대표로 유엔총회에 파견키로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CIC는 해방정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지도자중의 한 사람이었던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도 예외없이 도청하고 있었다.그는 미군정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한때 CIC에 의해 가택연금 상태에놓이기도 하는등 정치지도자로서는 견딜수 없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CIC의 이러한 광범위한 활동 덕분(?)에 美국립문서보관소가 시차를 두고 해제하고 있는 CIC문서들은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도 많이 밝혀주고 있다.
50년6월28일자로 작성된 CIC441파견대 문서는 그러한 예다.당시 도쿄(東京)에 주둔하고 있던 CIC441파견대는「이승만 일본 망명」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李박사의 망명설을 다루고 있다.「대체로 믿을만함」(Usually Re liable)이란 자체 등급으로 분류된 이 보고서에 따르면 李대통령은 2대 총선에서 패배하고 내각에 대한 불신임 투표에서도 패배할 경우에 대비해 일본의 사이타마(埼玉)縣 농장마을에 빌라를 구입토록 지시했다는 것이다.지역 농민들과 재 일한인단체의 반대로 이지역은 제외되고 대신 李박사의 대리인들이 고베(神戶)市와 교토(京都)縣에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안 일본 공산당이 고베에서의 李박사 거주지 구입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이 문서는 李박사의 망명 움직임을 처음 언급한 것이어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평가된다.
CIC의 군정기간 활동을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대간첩작전이다.CIC는 당시 빚어졌던 美.蘇간 첨예한 갈등을 반영,남한에 침투한 북한세력에 대한 사찰과 검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CIC의 좌익분열 공작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가 조봉암(曺奉岩)전향사건이다.이 사건은 46년 좌익세력을 분열시키기 위한 공작을 진행하던중 만들어진 것으로 CIC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봉암을 좌익에서 효과적으로 분리해 냈다.
CIC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인천지부를 습격,수색하던중 조선공산당 창당 멤버였던 조봉암이 박헌영(朴憲永:조선공산당 당수)에게 쓴 편지 한장을 발견했다.이 편지는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노선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CIC는 즉각 이 편지 를 東亞日報에제공했다.
이 편지가 공개되자 조선공산당은 조봉암의 당원자격을 박탈했고CIC는 이 기회를 틈타 5월말 조봉암을 체포,수사명목으로 10일간의 회유공작을 벌였다.석방된 직후 조봉암은 전향성명서를 발표,조선공산당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미군정의 언론통제에도 CIC가 동원됐다.46년5월7일 인천 CIC는 인천신문을 급습,사장이하 60여명을 전격 연행했다.5월5일부터 인천신문이 인천미군정청 적산관리국공업과장 노재룡(盧載龍)의 적산비행(일본인가옥부정점유)에 대해 3일간 연속 해 보도하자 갑자기 CIC요원들이 들이닥친 것이다.이 사건은 해방후 첫 필화사건으로 기록됐는데 위원장.편집국장등 5명이「군정청 조선인 직원의 명예훼손」명목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CIC의 대북(對北)활동 가운데 가장 괄목할만한 것은 역시 한국전쟁의 발발을 예감했다는 점이다.50년6월 한반도에 전쟁이발발했을 때 남한에 주둔한 경험이 있던 CIC 요원들에게는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케네스 맥두걸대위는『C IC의 역사:한국점령기간동안』이라는 문서에서『요원들의 조심스런 관측은 미군이 떠난후 6개월 후에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그는『미군이 주둔하고 있는동안 전쟁을 알리는 국경충돌이끊임없이 있었다.북한군의 충돌이 빈 번해졌고 CIC는 북한군 자신들도 모르는 공격날짜만을 제외한 모든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이러한 정보는 맥아더장군의 정보참모부를 경유해 미국정부에 정기적으로 보고됐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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