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칼럼>관철동시대 26.기록제조기 李昌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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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14세의 이창호(李昌鎬),세계 최연소 타이틀 홀더」.
89년 8월8일,이창호는 KBS 바둑왕전에서 우승해 드디어 생애 첫 타이틀을 따냈다.결승전에서 김수장(金秀壯)7단을 2대0으로 일축하고 영원히 깨지지 않을 14세 우승의 기록을 세운것이다. 이창호는 기록제조기였다.프로 3년째인 88년엔 승률.
최다승.연승.최다대국등 전부문의 기록을 휩쓸었다.89년 상반기에도 6개월 동안 무려 67국을 두어 53승14패.기록 4부문은 당연히 이창호의 몫이었다.이창호는 넘실거리는 불꽃처럼 바둑계를 태우고 있었다.그는 바둑에 대한 모든 통념을 재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인생을 알아야 바둑은 더욱 강해진다』고 말해왔다.계산능력은 시행착오 속에서 터득되고 정신력은 눈물어린 패배속에서 단련된다고 믿어왔다.그러나 이 14세의 철없는 소년은 바둑판 3백61로에 내재된 온갖 미망(迷忘)과 유혹 ,욕망과 한숨을 일직선으로 돌파해 갔다.
「동양의 머나먼 도(道)」라 불리던 바둑은 4천여년 동안 많은 문객들에 의해 금빛으로 색칠되어 왔다.바둑에는 인생의 그림자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음과 양이 움직이는 고요한 이치가 있고 변화무쌍한 풍운의 기틀이 있고 봄과 가을의 살리고 죽이는 권도가 있고…세도의 오름세와 내림세,인사의 성하고 쇠하는 이치가 모두 여기에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창호는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촌티 나는 팔자걸음으로 관철동을 느릿느릿 걸어와서는 착착 승리를 쌓아갔다.설마설마했으나 그는 자꾸 이겼고 점차 공포가 프로들의 뇌리에 자리잡기 시작했다.이창호가 지닌 불가사의가 공포를 증폭시켰다.이리하여 『이창호는 전대(前代)바둑고수의 환생이다』『우주에서 온 소년이다』라는 등의 말이 기가(棋街)에 떠돌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계산능력이 문제였다.이창호는 왜 노련미의 극치라 할 계산에서 더욱 발군인가.필자 역시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고 「신산(神算)」이란 별호를 붙이는 것으로 적당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이창호는 타이틀전에서 조훈현을 꺾지는 못했다. 그것이 언제냐.연전연승하는 이창호의 기세로 볼때 그건 시간문제로 보였고 바둑황제 조훈현의 위세를 생각할때 아직은 하는 분위기도 강했다. 이창호는 89년 조9단에게 두번 도전해 1대3,0대3으로 연패하고 있었고 대신 서봉수는 조9단에게 천신만고끝에 국기타이틀을 빼앗아냈다. 이때 서9단은 조9단에계 제1국에서 반집을 이겼는데 당시 "바둑"지는 이렇게 써놓고 있다.
"..이반집은 독재자 조훈현의 횡포에 저항하는 한방울의 눈물이다." 조훈현은 그만큼 막강했으나 이창호 또한 측량불허의 신기한 소년이었으나 바야흐로 사제간의 격돌은 숙명적이었다. 조9단의 전 신경은 9월로 다가온 네웨이핑과 잉창치배 결승전에 집중돼있었다. 이창호는 그의 배후에서 보검을 빼어든채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고 서봉수는 홀로 점을치며 재진군의 날을 기다리고있었다. 89년 8월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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