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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63. 홍신자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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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83년 무용가 홍신자의 출판 기념회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아내 한말숙, 필자, 홍씨, 음악평론가 박용구, 작곡가 백병동.

1973년 늦여름 한국에 온 홍신자는 ‘제례(祭禮)’라고 하는 춤을 췄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그의 고국 공연을 내가 주선한 것이다. 그해 2월 20일자 뉴욕 타임스는 ‘향(香)을 사르며 전통의상을 입고 춘 홍신자의 제례는 집약된 무게를 지닌 동양적 의식(儀式)이었다’고 호평했다.

서울 명동 국립극장에 선 그는 삼베 한복 치마를 입었는데 상의는 모두 벗은 상태였다. 이런 차림새로 무대 위를 굴러다니며 통곡했다. 몸짓뿐 아니라 몸에서 나는 모든 소리까지 춤이라고 생각한 홍신자는 엄청난 고성을 지르면서 무대를 휘저었다.

그 뒤에서 근엄하게 전통 악사복을 입고 연주하는 국립국악원 악사들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그는 뒤로 홱 나자빠져서 다리를 쫙 벌리기도 했는데, 이 사진은 건축가 김수근이 발행하던 ‘공간’이라는 잡지의 표지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정부의 검열에 걸려 삭제되고 말았다.

그만큼 이 공연은 당시 한국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이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어느 젊은 평론가는 신문에 혹평을 썼다. 그의 무용이 전위적인 데에 치중했을 뿐 예술적 의미를 잃었다는 것이다. 홍신자는 그 평을 읽고 속이 상한 듯 했다.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런 것 아무리 써도 홍 선생의 앞날에 아무 영향도 없을 테니 그런 줄 아시오.” 내 말을 듣고 그는 조금 힘이 나는지 킬킬 웃었다. 재미있는 것은 공연을 보러 온 많은 관중이 열광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한국 예술계 풍토는 새로운 세계로 과감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형편이었다. 내가 홍신자 공연 기획을 마무리하자 주한 독일문화원에서 유럽 현대재즈 연주회 공동 기획을 제안해 왔다. 그 소식을 들은 한 음악가가 “뭐? 재즈?”라며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반면 홍신자는 공연 제목에 ‘전위’라는 단어를 넣지 말자고 했었다. “내 춤은 전위가 아니라 그냥 현대 스타일입니다. ‘전위’ 대신 ‘현대’로 바꿔는 게 좋겠어요.” 그만큼 그는 자신의 춤에 확신이 있었고 ‘지나치게 실험적이 아닌가’ 라는 우려 따위는 염두에도 없는 듯했다.

홍신자의 춤에 대해 당시 대다수 무용가들은 질색했다. “황 선생님, 그런데 그 홍신자 춤이 도대체 뭐가 좋습니까?” 공연 뒤 한 유명 무용가가 얼굴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을 정도다. “내가 홍신자 무용을 좋다고 한 적이 없어요. 나는 음악가라서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지요. 하지만 내가 아는 게 하나 있습니다. 이제 몇 년 지나면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홍신자 흉내를 낼 것이라는 사실이지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됐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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