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46. 전위예술과 가야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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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백남준(左)씨가 1968년 6월 10일 뉴욕 타운홀에서 연 ‘재판기금 모금 연주회’. 오른쪽은 샬롯 무어만.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한복을 갖춰 입고 무대에 앉았다. 즉흥적인 남도 선율을 타는 도중 샬롯 무어만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채로 커다랗고 까만 자루를 들고 나왔다. 그 자루에는 지퍼가 달려있었다. 무어만은 지퍼를 열어 그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지퍼를 닫고 무대 위에서 열심히 굴러다닌다. 가야금 소리에 맞춰 굴러다닌다. 그러다가 가끔 지퍼를 열고 바깥을 내다보기도 하고 팔과 다리를 내밀었다가 집어넣기도 한다. 나는 가야금 연주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혁신적인 무대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 무대는 백남준 선생이 1968년 6월 10일 ‘재판 기금 모금 연주회’라는 이름으로 미국 뉴욕의 타운홀에서 연 공연이었다. 옷을 모두 벗은 무어만이 공연을 하다가 경범죄로 처벌받은 뒤 뉴욕 경찰을 상대로 낸 소송에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연 것이다. 그는 내게 찬조출연을 부탁했고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백 선생과 함께한 첫 공연이었다.

 나는 백 선생과 함께 세 차례 공연했다. 두 번째는 86년이었다. 내가 하버드대에 교환교수로 가 있을 때였는데 백 선생이 위성 쇼 ‘바이바이 키플링’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나는 뉴욕에서, 그리고 다른 음악가들은 서울과 도쿄에서 동시에 연주했고, 백 선생은 이러한 모습을 위성으로 연결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세 번째 공연은 2006년. 그의 추모행사에서였다. 서울 삼성동 경기고등학교에서 나는 그해 1월 세상을 떠난 그를 위해 연주했다. 학교 안에 그의 분향소가 차려졌다. 나의 무대는 바로 그 분향소였다. 나는 그와 함께 연주하고 있는 듯했다. 묘하고 슬펐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2002년 뉴욕에서다. 백 선생의 설치미술전이 열린다고 해 짐을 풀자마자 달려갔는데 휠체어를 탄 그가 나타난 것이다. 무척이나 반가워하면서 “시간 맞춰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그 약속을 못 지켰다. 그때 그는 휠체어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를 만난 뒤 예술에 대한 나의 상식은 모두 부숴졌다.

 나는 그를 ‘백형’이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 ‘미스터 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미스터 황이 부러워. 1500여 년의 전통이 있는 음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아. 내가 하는 일은 전통이라고는 없어”라고 말했다.

유머와 재기가 넘치면서도 진지한 예술가 백남준. 나는 그를 처음 만난 충격을 68년 『월간중앙』에 써서 국내에 그의 이름과 예술을 알렸다. 우리가 처음 만난 지 40년이 돼 가고 그는 이제 내 곁에 없다. 요즘도 내 귀에는 이 기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요즘 아이디어가 빈곤해. 알프스 산속에 들어가 삼국지 좀 읽고 와야겠어”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 말이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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