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 <121> 시처럼 사는 … 우리네 삶 속 풍경 네 가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아마도 카뮈의 말일 게다. 나는 글을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이 재기 어린 명제가 글로써 밥을 버는, 그러니까 소위 글쟁이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주위는 이미 문학적인 것으로 충만하다. 소설책 한 권 안 읽고, 시 한 수 못 외워도 우리네 삶은 진즉에 문학적이다. 문학터치가 마주했던 삶 속의 문학 풍경을 전한다. 아니 우리네 사는 모양이라는 게 되레 맞겠다.

① 어떤 판결문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대전고등법원 박철 부장판사가 쓴 판결문의 일부. 딸 명의의 임대아파트에 홀로 사는 칠순 노인에게 주택공사가 퇴거 요청을 했다. 노인은 소송을 냈고 마침내 항소심에서 이겼다. 그때의 판결문이 올 초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법도, 문학보다 고울 때가 있다.

② B급 작가

‘쓰라고, 쓰면 뭘 해, 눈썹을 그리고 주름살을 펼수록 돈이 드는걸. 내 돈으로 시집내고, 문학상 준다고 은근히 팁을 요구하는 당신. ‘오늘의 주목 받는 시인 100명’ 주목받는 시인은 돈을 내란다./…/시를 쓰면 쓸수록 돈이 드는 나는 B급 작가다.’(‘나는 B급 작가다’ 부분)

 올 봄 박수자란 시인이 시집 『나는 B급 작가다』를 보내왔다. 시집은 단번에 자비(自費)로 출판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시집이 팔리지 않는 시대, 출판사는 유명 시인을 빼곤 시집 출간을 꺼린다. 그런데도 시집은 거의 날마다 문학기자에게 배달된다. 시인은 시집 말미에 ‘죽기 전에는 … 좀 더 나로 살아야지’라고 적었다. 호주머니 털어 시집 엮는 전국의 무명시인에게 경의를 표한다.

③ Deli Poet

언제부턴가 미국에서 젤리 상자가 날아온다. 뉴저지에서 델리(Deli)를 운영하는 김형오(63)씨가 보내는 선물이다. 하루는 상자 안에 카드가 들어있었다.

‘언제나 깔끔한 차림의 흑인 아주머니가 아침 일찍 저의 가게에 와 커피와 신문을 사가곤 했는데 저를 델리 포잇(Deli Poet:구멍가게 시인)이라 부르며 가깝게 지냈지요. 어느 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야 할 일이 생겨 자주 못 볼 것 같다고 했는데 정말 그 뒤론 한 번도 못 만났습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고서야 이름이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93년 수상자)인 걸 알았지요.’

그가 9월 한국에서 시집 『하늘에 섬이 떠서』를 출간했다. 젤리 얻어먹은 죄가 있어 소개하진 않았다. 대신 곽재구 시인이 쓴 해설의 한 대목을 옮긴다. ‘(가게)주방 벽에는 수십 장의 낡은 메모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시작 메모였다. 십 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메모도 있었다.’

④ 종소리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민족작가대회 현장에서 조총련 시인 몇몇과 명함을 교환했다. 그뒤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조총련 시인 동인지 ‘종소리’가 날아든다. 일본 땅에서 조선인으로 사는 어려움은 대충이나마 짐작한다. 하나 거기서도 우리 말을 붙들고, 급기야 시까지 빚는 조선인의 마음은 차마 헤아리지 못한다. 다음은, 지난해 여름호에 실린 한 작품이다.

‘엄마 내 이름은 한진(韓辰)이죠?/그렇죠? 정말이죠?/그런데 성이 왜 한(韓)이에요?/내 친구들은 다나카(甲中)이고 스즈키(鈴木)잖아요?/나만 왜 한(韓)이에요/이름표를 바꿔줘요 빨리 달아줘요’(‘내 이름’ 부분, 이승신)  

손민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