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RIReport] 시장에 손 안 댈 대통령이면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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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며칠 전 귀갓길의 택시 안이었다. 또 BBK인가 뭔가 하는 뉴스가 들려왔다.

“아저씨, 소리 좀 죽여 주시겠어요?”(기사 아저씨의 성향을 몰라 꺼 달라는 소리는 감히 꺼내지도 못했다.) 그랬더니 아예 라디오를 꺼버리면서 백미러로 내 행색을 힐끗 보더니 다짜고짜 “이번에 누구 찍어야 합니까?”하는 게다.

“글쎄요.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라서…”라는 얼버무림이 더 자극을 한 모양이었다.

“기껏 경제 좀 살려내겠다는 사람을 뽑으려 했더니 뭐가 그렇게 구린 데가 많은지, 그렇다고 다른 쪽을 보면 말하는 걸로 봐서는 또 온 나라를 갈라놓을 것 같고. 그래도 경제가 좀 나을 것 같은 사람이 낫지 않겠나 싶었더니, 웬 사람이 툭 튀어나와 표를 갈라 놓고. 이거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모르겠다고 대꾸하기에도 지친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 우리 같은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평소엔 제 밥벌이에 코가 석자이다가도 가끔은 일자리다 실업자다 물가다 나라 경제 걱정하는 사람들은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다.

오랜만의 대통령 선거가 BBK 같은 건으로 선거인지 진흙 밭 싸움판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되기 전에는, 그래도 대선은 ‘시장경제가 되살아 났으면…’하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헤픈 씀씀이, 폭탄 식의 세금 거두기, 당하는 사람도 이해하기 힘든 얽히고 설킨 규제, 그리고 독버섯처럼 늘어나는 공무원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겐 5년마다 한 번씩 물안개처럼 일어나는 바꿈의 기회다.

이들 시장경제 신봉자들이 이번 선거를 시장경제를 바로 세울 또 한 번의 기회로 여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어느 때보다 시장을 무시하고 시민 위에 군림해 온 정부가 시장을 존중하고 시민을 두려워하는 정부로 바뀔 것 같은 분위기라서 그렇다. 시장과 민간은 안중에 없이 매사에 나서는 정부, 걸핏하면 계층과 지역을 갈라놓고 겉으로는 홍길동처럼 한 곳을 털어 다른 곳을 돕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변사또처럼 월급이다 연금이다 자기네 잔치에 흥청망청 쓰는 정부나, 그런 정부에 가깝거나 그런 정부가 좋은 정부라고 외치거나 또는 그런 정부에 빌붙어 온 정당보다는 지난 10년 (상대당보다는) 시장을 지키고 민간을 앞세우려 한 정당, (성공은 못했지만) 막무가내로 나서려는 정부에 제동을 걸어 온 정당, 또 (목숨을 걸고 막지는 않았지만) 국민 주머니 털기가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얘기는 해 온 정당이 더 지지도가 높은 것 같기 때문이다.

시장경제 운운할 것도 없이 그저 나라 잘되기를 고대해 온 보통사람들이 바라는 건 세상이 깜짝 놀랄 그런 큰 바람이 아니다. 그저 기업하기 편하게 규제 좀 풀어 줄 사람, 제 일자리나 제 월급은 각자 알아서 챙길 테니 생활 쪼들리지 않게 세금 좀 깎아 줄 사람, 거둬들인 ‘우리 돈’을 한푼이라도 아껴 쓸 사람, 그리고 한 걸음 더 나간다면 분칠하고 TV에 나타나 온 나라를 들쑤시는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 다음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는 정도일 뿐이다. 한마디로, 도와주지 않아도 좋으니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둘 사람이면 된다는 것이다.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택시 안에서 답을 해 드리지 못한 기사 아저씨, 그때 드리고 싶었던 말씀 지금 드립니다.

그래도 민간을 편하게 할 것 같은 정당, 규제와 세금을 줄여 줄 것 같은 정당을 등에 업은 후보가 낫지 않을까 싶네요. 또 속는다 해도 그게 후회가 덜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대통령 혼자서 나라를 꾸려가는 게 아니니까요.
 
대통령이 규제를 줄이는 것도, 세금을 내리는 것도, 공무원들이 민간더러 콩 놔라 팥 놔라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뜻을 같이 하는 정당과 힘을 합해야 가능하니까요. 마음에 꼭 드는 후보가 없더라도 꼭 투표하세요. 저도 그럴 겁니다.

김정수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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