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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리스크 줄이려면 치밀한 ‘바통 터치’부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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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호 14면

2004년 8월, 영속기업을 비전으로 제시하던 김종훈 한미파슨스 사장의 고민은 후계구도에서 멈췄다. 김 사장은 1996년 미국 파슨스와 합작으로 국내 최초의 건설사업관리(CM) 회사를 세워 이 분야를 개척해온 인물. 그는 회사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한 첫 번째 조건으로 ‘CEO 승계 프로그램’을 구상했다.

CEO 승계 어떻게 할 것인가

“회사의 지속 성장을 위해선 새로운 리더십이 창업 마인드와 오버랩돼야 시너지를 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려면 후계 CEO 발탁부터 훈련, 소프트랜딩이라는 3단계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때부터 김 사장은 CEO 승계와 관련한 자료들을 하나 둘씩 모았다. 심지어 은행장·공기업 CEO 공모 프로그램까지 챙겼다. 3년여의 준비 끝에 김 사장은 최근 사내에 “늦어도 내년 1월 말까지 예비 CEO를 선발하겠다”고 공지했다.

그의 말대로 한미파슨스에선 내년 초부터 본격적인 CEO 경쟁이 시작된다. 김 사장은 “외국인을 포함한 네 명의 후보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이들에게 주요 보직을 번갈아 맡겨가면서 평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역 CEO로서 저는 대부분의 권한을 이들에게 넘겨주면서 ‘지켜보고 도와주는’ 일에 주력할 것입니다. 서류 결재도 가급적 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다만 조직갈등을 부추기고 ‘줄서기’ 같은 문제점이 생길 수 있어 후보 명단은 공개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강석진 전 GE코리아 회장 등 사외이사로 영입한 ‘쟁쟁한’ 전직 CEO들과 ‘심판’을 맡을 계획이다. 후계자를 현역 CEO가 단독 결정할 수 있다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다. 김 사장은 ‘예비 CEO’ 평가기간을 최장 2년으로 잡고 있다. 일단 1년간 이들의 실적과 성과를 평가하고 그것이 부족하면 1년을 더 볼 작정이다. 그런 다음 최종 후보자에게 1~2년에 걸쳐 ‘바통 터치’를 하고 2선으로 물러서겠다는 것이다. 후계 구상부터 승계까지 최장 5년이 걸리는 셈이다.

한미파슨스처럼 CEO 후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5~6년 뒤의 CEO 재목을 육성하는 삼성의 ‘차세대 리더 양성과정(SLP·Samsung Leadership Program)’이나 LG전자의 ‘후계자 계획(Successor Plan)’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삼성은 전체 1000명이 넘는 임원 가운데 상위 30명 정도를 집중 조련한다. GE의 ‘세션-C(Session-C)’, 모토로라의 ‘OMDR’, 3M의 ‘석세션 플랜(Succession Plan)’ 등 글로벌 기업의 경영승계를 벤치마킹한 모델로, 한국에선 아직 도입단계라는 평이다. 삼성·LG·SK 등은 사내에서조차 비밀에 부쳐가면서 스타급 인재를 육성하고 있는데, 이들을 ‘준비된 CEO’로 육성하고 있다.

그러면 CEO 승계 프로그램은 왜 필요한가.
2004년 4월 20일 맥도널드의 CEO인 제임스 칸탈루포가 심장발작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이때가 새벽 4시쯤이었고 칸탈루포는 바로 세상을 뜨고 만다. 맥도널드는 이날 오전 7시에 이사회를 열어 당시 최고운영책임자(COO)였던 찰리 벨을 신임 CEO로 선임한다. 벨 역시 7개월 후 암으로 세상을 떠나긴 했으나 경영권 공백이 발생할 틈을 주지 않은 사례로 유명하다.

국내 굴지의 A그룹 총수는 ‘호칭 인사’로 유명했다. 가령 현장을 방문해 모 이사의 브리핑을 받는 도중 능력이 있다 싶으면 그를 ‘상무’로 호칭해 곧바로 승진시키는 것이다.

능력과 로열티를 평가해 그 자리에서 파격적인 조치를 내렸던 A그룹 총수의 인사 스타일은 분명히 임직원들에게 자극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기업 영속성을 생각한다면 그다지 현명한 방법은 아닐 수 있다. 인사 컨설팅 회사인 한국타워스페린의 박광서 사장은 “기업이 영속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위기를 수없이 극복해야 한다”며 “영속하는 기업과 실패하는 기업의 차이는 이 같은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서 차이가 나는데 CEO 승계 프로그램은 그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했다.

글로벌 기업에서 CEO 승계 프로그램은 보편화된 일이다. 현역 CEO가 불의의 사고, 경영성과의 악화 등으로 갑자기 교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왓슨와이어트 김광순 사장은 “다국적 기업에선 현역 CEO가 후계자를 분명하게 지목해야 한다”며 “현역 CEO에겐 ‘다음 선수(CEO 승계자)’를 놓치지 않을 책임과 그를 잘 육성할 책임이 동시에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기업은 한국법인 CEO라고 해도 CEO 후보자와 ‘같이’ 일하는 시스템이 정착돼 있습니다. 현지 CEO는 본사의 인사담당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후보자에 대해서 밀도 있는 교육과 코칭을 하도록 돼 있지요.”

글로벌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CEO 승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에 대해 김 사장은 특유의 권력분산형 기업문화에서 찾는다. 이는 거꾸로 CEO의 한마디에 벌벌 떠는 권위주의적 기업 메커니즘에선 CEO 승계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얘기다. 김 사장은 “한국 기업은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다”며 “만약 ‘대안’(후계자)이 있다고 하면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다. 심지어 재벌 총수의 아들이라고 해도 후계자라는 표현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후계’라는 개념이 최고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CEO 승계 프로그램이 ‘어떻게’보다 ‘누구냐’에 집중돼 있다는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인재 육성에 대한 진정성 없이 누가 후계가가 되느냐는 ‘게임’만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김 사장은 “실제로 중요한 것은 ‘누가 CEO 후보’라는 게 아니라 ‘차기 CEO를 어떻게 길러내느냐’다”라고 강조했다.

그런 면에서 김 사장은 B자동차부품 회사를 모범 사례로 제시한다. 이 회사는 최근 1년간 전체 임원과 해외법인장의 리더십을 평가했다. 차기 CEO 후보를 가리는 것은 물론 임원들의 능력을 제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 사장은 “리더십 평가를 받고 난 다음 임원들이 몰라보게 ‘각개약진’했다”고 말한다. 가령 ‘평소 화를 잘 낸다’는 지적을 받은 한 임원은 신경정신과에서 심리치료를 받았고, 구매업무를 담당하던 임원은 ‘영어가 부족해 글로벌 소싱이 힘들다’는 평가가 나오자 어학을 집중 교육받고 있다는 것이다. 김 사장은 “CEO 승계의 정착은 한국 기업의 조직문화가 한 단계 성숙하는 가늠자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도 CEO로 유력한 임원에 대해 근거 없는 마타도어(흑색선전)로 흔들어대는 일이 잦습니다. 한국 기업에서 CEO 승계 프로그램은 기업 경영의 미래 리스크를 줄이겠다는 본연의 측면과 함께 조직 변화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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