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교수님의 '마지막 수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3면

생전의 이기용 교수(왼쪽에서 둘째)가 2006년 8월 27일 성균관대 법대 제자들과 충남 태안군 안면도로 함께 여행을 떠나 찍은 사진. 이 교수는 최근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제자들과의 추억 어린 사진들을 모으고 있었다고 한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학기 마지막 수업까지 강단을 지키던 한 대학 교수가 종강 뒤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성균관대 법학과 이기용(50) 교수는 5일 오후 2시45분쯤 서울 명륜동 캠퍼스의 연구실에서 심근경색 증세를 보이며 쓰러졌다. 이날 오전 2학기 마지막 수업을 마친 뒤 돌아와 기말고사 문제를 출제하다 찾아온 동료 교수와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이 교수는 인근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으나 끝내 숨졌다.

그는 이날 오전 9시부터 학부생을 대상으로 '담보물권법'을 강의했다. 원래 2시간 강의였으나 기말고사를 앞둔 제자들을 위해 1시간여 더 수업했다.

이 교수는 두 달 전 직장암 3기라는 뜻밖의 판정을 받았다. 의료진은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은 뒤 곧 수술해야 한다"며 "체력을 아껴야 하니 강의를 중단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강의하면서 치료를 받겠다"고 고집했다. 이번 학기에 맡은 세 과목 강의를 중단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수술을 내년 1월로 미루고, 치료와 강의를 병행했다. 5주간의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로 체중이 7~8㎏가 줄었다. 그래도 학생들에겐 내색하지 않았다. 조교에겐 "암에 걸렸다는 말을 절대 알리지 마라"고 말했다. 마지막 강의 말미에야 학생들에게 암 투병 사실을 알렸다.

동료 박광민 (법학)교수는 "항암 치료로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도 열정적으로 수업을 계속하다 과로로 쓰러진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성대 법학과를 졸업한 이 교수는 1990년 모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충북대.경기대 교수를 거쳐 98년부터 성대에서 재직해 왔다. 민사법, 특히 소멸시효에 관한 그의 논문들은 법원 판례에 인용될 만큼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고 동료들은 전했다.

5일 암 투병 중에 학기 마지막 수업을 마친 뒤 숨진 성균관대 법학과 이기용 교수의 홈페이지. 게시판엔 이교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자들의 글이 이어졌다.

제자 최경환(32.여.법대 대학원생)씨는 "학생들을 '인격체'로 존중해 주셔서 교수님을 따르는 학생이 유독 많았다"며 "학생들 사이엔 스스로 '기용 학파'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평소 여행과 사진 찍기를 즐긴 이 교수는 1주일에 한 번 부인에게 꽃다발을 선물해 학교에선 '로맨티스트'로 알려졌다.

6일 서울대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빈소엔 교수를 추모하는 학생의 행렬이 이어졌다. 법대 2학년 정재준(21)씨는 "항상 지식뿐 아니라 법대생의 덕목을 강조하셔서 '참선생'이라고 여겨왔다"며 "입학 때부터 웃음으로 대하시던 모습을 더 뵐 수 없다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안형균(19)씨는 "수업을 마치며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 수술 뒤 다시 보자'며 밝게 웃으시던 교수님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울먹거렸다.

이승우 법과대학장은 "평소엔 학생들에게 인자하면서도 학문엔 엄격해 동료와 제자들의 신망이 높았다"며 "실력 있는 소중한 분을 잃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학교 측은 7일 오전 10시 법학관 모의 법정에서 법과대학장으로 영결식을 치를 예정이다.

천인성.송지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