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나 만병통치약은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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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호 12면

외환위기는 어디서 왔을까.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덩치가 커졌고 구조가 복잡해졌는데도 경제주체들이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위기의 싹이 텄다. 기업과 은행, 소비자 모두가 정부의 중앙집권적 통제 범위를 벗어났는데도 그 지시에 따라 혹은 남들이 좋다고 하니 한쪽 방향으로 몰려가면서 위기를 불렀다.

멈추지 않는 논란 … IMF 처방은 옳았다

그렇기 때문에 ‘위기 극복’에서도 정부가 주도하는 신속하고 효율적인 처리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구조조정 초기단계에선 누가 그 권한을 행사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구조조정 정책의 핵심에 있다고 알려진 금융감독위원회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집중 취재 대상이었다.

하지만 막상 정부가 작성해 발표한 구조조정 정책을 보면 기업·금융회사가 스스로 개혁을 해야 하며, 정부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세제·법률 같은 인프라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금융회사에 대해선 주주·채권자·채무자 같은 이해당사자의 협의를 통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부실규모가 확정된 뒤 정부가 인허가권을 행사해 합병과 매각 등을 확정한다는 점이 달랐다.

이처럼 위기의 본질과 극복 방향은 초기단계부터 분명히 제시됐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경제주체와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구체적인 해법을 찾기도 바쁜데 외환위기의 발생원인을 놓고 끝없는 설전이 계속됐다. 집에 불이 났는데 끌 생각은 안 하고 왜 불이 났는지에 대한 진단만이 분분했다.

예컨대 구조조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업 부채비율 가이드라인의 적정성을 두고 뜨거운 논쟁이 있었다. 또 ‘금융 구조조정이 먼저냐, 기업 구조조정이 먼저냐’와 같은 논란도 있었다. 전문가 의견을 모아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해야 할 정책당국자들이 여기저기서 해결책을 구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신속한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신속한 구조조정’이란 처방 역시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불을 빨리 끄려면 화단을 짓밟을 수도 있다. 또 집주인이 목숨처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골동품을 깨뜨릴 수도 있다. 무엇보다 신속한 구조조정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사후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그 책임을 무시할 만큼 미성숙하고 단순한 사회는 결코 아니었다.

둘째, 신속을 강조하는 쪽은 정부주도형 경제성장과 부실처리에 익숙한 사람들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정부가 나서서 이해관계를 정리하면 빨리 끝나는데 도대체 시간만 끌고 무엇 하느냐”는 채근이 많았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이나 금융회사가 구조조정 대상인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사전에 알 수 있게 하라는 것이었다.

반면 각종 위원회와 이해관계자가 집회를 열어 처리하는 방식은 시간도 지체되고, 객관성이 없으며 책임회피라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우량기업이 상황에 따라 내일의 부실기업이 될 수 있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했던 게 당시 현실이었다. 부실한 회사를 가려내는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조급증에 대응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이른바 ‘빅딜’이었다. 그러나 난마처럼 얽힌 이해관계의 사슬을 풀기 위한 정부의 개입은 무력하기만 했다. 많은 어려움 끝에 ‘반도체 부문’의 빅딜이 성사되기는 했으나 나머지 분야는 그야말로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물론 이해관계자 협의를 통한 구조조정도 온갖 논란과 오해를 헤쳐나가야만 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중앙집중식 부실 처리와 달리, 민간이 주도하는 분권형 방식은 처음엔 인식도 부족하고 역량도 모자라 성과가 매우 더뎠다. 예컨대 기업 워크아웃제도는 몇 달간 이렇다 할 실적이 없었고, 대형은행의 인수합병(M&A)도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몇몇 부실기업에 대한 워크아웃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일부 금융회사 구조조정에 대한 경험이 쌓이면서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이해당사자 합의를 통한 방식이었기에 사후적인 법률분쟁의 여지도 크지 않았다. 이에 비해 ‘빅딜’ 방식은 두고두고 분쟁거리가 남았고, 이해관계자 간 이견 조정의 어려움으로 실제 소요시간도 훨씬 길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한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값진 교훈은 결국 ‘언제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는 객관적 문제해결법은 없다’는 것이다. 한 가지 상황에서도 경제주체별 인식은 다를 수 있다. 앞으로도 서로 다른 방향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다양성의 경제구조’가 돼야만 경제 전체가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서근우 부행장은

1997년 12월 26일 서울 여의도 한국투자신탁 15층 사무실. 이헌재 비상경제대책위 기획단과 서근우 금융연구원 연구위원, 재정경제원 이희수 과장 등 6명이 모였다. 30대 말~40대 초가 주축인 전문가 6명은 외환위기의 불을 끄기 위해 김대중(DJ) 정부에서 작동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만든다. 특히 서 위원은 몇 달 뒤 금융감독위원회 제3심의관으로 부임해 5대 대그룹의 구조조정을 총괄하는 등 사실상 집도의(執刀醫) 역할을 했다. 1959년생으로 서울대 사회교육학과를 나와 경제학 석·박사를 땄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는 한국신용평가 시절부터 호흡을 맞춰왔다. 2005년 3월부터 하나은행 부행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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