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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의사선생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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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닥터스 씽킹
제롬 그루프먼 지음
이문희 옮김
해냄,
395쪽, 1만3000원

30대 미국 여성 앤 도저는 2004년까지 15년 동안 30여 명의 의사를 돌아가며 만났다. 식사를 하면 위가 쥐어짜는 듯 아팠고, 구토가 잦았지만 어떤 의사도 그를 치료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정의는 위염으로 보고 제산제를 처방했고, 정신과 전문의는 음식물 혐오증이라며 심리치료를 했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내과전문의의 충고대로 소화가 잘 된다는 파스타와 시리얼을 먹었더니 장 경련까지 겪었다. 급기야 영양결핍 속에 체중이 37kg까지 떨어졌고 면역력도 저하됐다.

하지만 2004년에 만난 소화기 내과 전문의인 마이런 팔척 박사는 소아지방변증이라고 진단했다. 밀가루 등에 들어있는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특이 질환이었다. 그런 사람이 영양을 보충한다고 파스타 같은 곡물을 잔뜩 먹었으니 병이 악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버드 의대 교수인 지은이는 팔척 박사가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환자의 말을 자세히 들은 데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의사들이 병만 알고 환자는 잘 모른다고 개탄한다. 광범위한 병리학적 지식과 의료기술을 바탕으로 병에만 접근할 뿐, 사람을 제대로 살피고 대하는 데는 다소 서툴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여자 어린이가 심한 감염증으로 입원하자 의사들은 중증합병성면역결핍장애(SCID)로 진단했다. 골수이식이 필요한 병이었다. 하지만, 수술을 기다리는 동안 우유를 잘 먹어 체중이 불면서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사실은 SCID가 아니고 영양결핍에서 비롯한 일시적인 면역력 저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최종 진단명을 감추고 당시 검사결과만을 한 학회에 소개했더니 모든 참석 의사가 SCID로 진단했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이를 두고 익숙한 것에 의존하는 ‘진단 관성’이 만든 오류라고 지적했다.

지은이는 자신의 임상과 교육 경험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인간의 판단은 완벽하지 않으며, 의사들의 진단과 치료는 불확실성과의 전쟁”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러면서 과학과 영혼이 결합한 새로운 직업의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충고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비단 의사만이 아닐 것이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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