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블로그] 절대권력의 고독을 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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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위원장은 절대 권력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영접하기 위해, 4ㆍ25 문화 회관앞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일 위원장은 그랬다. 약간 삐딱하게 서서 뒷짐을 지고 있는 모습은 영락 없이 절대 권력의 상징으로 비치고 싶어하는 모양새 그 자체였다. 그렇게 김 위원장은 세상과 시대와 타협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고집스럽게 꼿꼿이 서 있었다. 튀어나온 배와 무관심한 듯한 근엄함, 엄숙한 듯한 무표정 등이 어김없이 절대 권력 그 자체를 상징했다.

2일 낮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4.25 문화회관 광장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노무현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평양=연합뉴스)

단 한 명의 배석자만 대동한 채 참석한 정상회담에서도 그랬다. 정상회담 일정을 하루 더 연기하자는 제안에 노 대통령이 ‘저보다 더 높은 두 곳’과 상의해야 한다고 했을 때 김 위원장은 ‘그것도 대통령이 결심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가서 물은 것이었다. 절대 권력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절대 권력의 면모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간간이 배어나오는 절대 권력의 상대적 고독이었다. 영접 당시의 단호한 태도와 달리, 그 후의 김 위원장은 눈빛과 표정이 많이 흔들렸다.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친구를 갈구하는 허허로움이 언행에서 종종 배어나왔다. 1차 정상회담에서 지나치게 그런 허점을 보였다는 판단에서였는지, 이번에는 절제하려는 인상이 강했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7년 전에 비해 훨씬 더 자주 고독감이 묻어나오는 말과 행동을 보였다.

정상 회담을 위해 노 대통령이 묵는 백화원 초대소로 찾아가, 만나자마자 건넨 첫 마디가 ‘음주 잘 하십니까?’였을 때도 그랬다. 그 후의 문답은 형식적으로 흘렀지만, 김 위원장은 그 순간만큼은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싶어하는 고독한 남자였을 따름이다.

노 대통령이 준비해간 선물을 건네던 순간에도 김 위원장은 잠시 비슷한 눈빛을 보인 적이 있다. 1억원 짜리 병풍이나 명품 팔도 차를 소개하던 순간이 아니었다. 우리 명작 영화 DVD를 건네던 때였다. 영화광답게 김 위원장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그러나 ‘진귀한 물품들을 가져오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면서, 김 위원장의 눈빛은 예의 그 무덤덤한 것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국 영화에 대한 설레임이 일던 그 짧은 순간, 그는 절대 권력으로 즐긴 최고급 술과 향응, 그리고 여자로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한 고독한 남자일 뿐이었다.

마음이 풀린 그가 ‘정상 회담 일정을 하루 늦추면 어떤가’라는 제안을 할 때도 비슷했다. 무슨 대단한 책략 때문에 꺼낸 얘기가 아니라, 그냥 이 이벤트를 더 연장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노 대통령과의 팽팽한 줄다리기조차도 고독한 일상을 잊게 해줄 생활의 활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세상과 시대와의 투쟁에 지치고 힘든, 65세의 이 독재자는 은연 중에 외로운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다른 많은 중독 현상처럼, 권력 중독 역시 개인적으로는 고독을 해소하는 한 방편이다. 그러나 중독이 궁극적으로 해법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상황만 악화시킨다는 것 역시 권력 중독이 다른 중독과 흡사한 점일 것이다. 권력 중독은 지상 최후의 절대 권력을 낳았지만, 그 때문에 절대 권력자는 더욱 더 외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결코 신나는 경험만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미래와 존망이 걸린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김정일 위원장이 언뜻언뜻 보여준 절대 권력의 고독은 의외로 통일로 가는 길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겠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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