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경찰의 조작수사였으면…/이경순(기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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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자녀와 함께 뉴스 보기도 겁나
어제 아침 텔레비전 뉴스에서 『한약상 부부 피살사건의 범인이 아들로 밝혀졌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한탄이나 인륜·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식의 비분강개는 잠시 밀쳐두기로 하자.
아들이 범인이란 아침뉴스를 들으면서는 경찰에는 참으로 미안하지만 강압수사에 의한 허위자백이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들었다.
아무리 패륜의 시대라 하지만,자식이 부모를 죽인 사건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그래도 어느 한쪽도 아닌 부모 모두를 그것도 수십군데씩을 난자한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방법으로 죽이는 그런 무서운 짓을 설마 그속으로 낳은 아들이 했으랴 싶었다.
두번째 희망은 『정말 그 아들이 진범이라면 범행 당시 히로뽕같은 마약에 취해 환각상태에서 저지른 일종의 정신착란 행위였으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녁의 신문보도는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범행동기와 함께 치밀한 사전계획 범죄라는 사실을 명백히 들이댐으로써 이 험한 세상 부모된 자의 어리석은 희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텔레비전 9시 뉴스 첫머리에 아들이 범인이라는 보도를 시작하자 범인과 같은 또래인 우리 집 아이는 슬그머니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모와 자식이 나란히 앉아 보고 듣기에 이보다 더 처참한 이야기가 또 있을까.
아,어쩌면 좋단 말인가. 세상을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만들고,이 끔찍한 젊은이를 길러낸 사람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란 사실을­.
궁핍했던 어린시절을 한풀이하듯 염치도 도덕도 양심도 다 내팽개친채 돈벌이에 종교처럼 매달려 산 우리 부모세대들­ 그 물신주의와 배금사상과 황금만능주의가 오늘 이 냄새나고 병든 세상을 만들었다.
『내 자식한테만은 돈없는 설움을 겪지 않게 하겠다』는 보상심리가 지나쳐 과보호와 무절제로 키운 아이들이 버릇없고 무책임하며 충동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미운 모습으로 자라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거기 더해서 『나야 돈없어 못배웠지만 너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학력보상심리까지 겹쳐 자식의 능력을 무시한 지나친 기대와 요구가 세대간의 갈등을 부르고 빗나간 청소년들을 양산하는 사태로까지 치달은 것이다.
가정에서도,학교에서도,사회에서도 옮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가치관을 길러주기보다는 남을 밀치고 앞서는 법,남을 꺾고 이기는 법만을 가르쳐온 현실에서 오늘의 참극은 이미 싹터왔다고 할 수 있다.
도피성 유학의 문제점을 뻔히 알면서도 여전히 등을 떼밀어 「유학」을 보내는 어리석은 부자부모 노릇은 이제 제발 그만두자.
이번 사건같은 극악한 경우가 아니라해도 「유학」이 빚어내는 갖가지 폐해는 「유전유죄」라는 네글자로 요약할 수 있다.
제2,제3의 박한상이 될 불씨를 안고 있는 「오렌지족」이 어디 남의 나라 딴 세상 이야기인가. 요행 내 아이는 아니라해도 내 아이와 더불어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갈 우리 아이들인 것이다.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 제발 부끄러움을 배우자. 오늘 이처럼 살기 싫어지는 세상을 만든 사람은,텔레비전에 비친 얼굴을 바로 쳐다보기조차 끔찍한 범인을 낳고 기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들 모두인 것이다.<방송평론가·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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