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3500년 전 이집트 의사의 사랑·모험·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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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시누헤 1, 2
미카 왈타리 지음, 이순희 옮김
동녘, 400· 376쪽, 각 권 1만원

10년 전, 한 이국적인 이야기가 한국 독자들을 강타했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나라로만 알려져 있던 이집트를 수 천 년 전 영웅의 숨가쁜 권력 암투와 매혹적인 사랑의 현장으로 탈바꿈시킨 그 책 말이다. 밀리언 셀러가 된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얘기다.

 이 책 역시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이다. 주인공의 세 글자 이름을 딴 제목도 닮은 꼴이다. 하지만 『람세스』의 후광을 노린 책일 거라는 예상은 실례다. 우리가 해방을 맞던 1945년 발표됐고, 83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출간되기 전까지 34년 동안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외국소설이라니 말이다. 40개 언어로 번역됐다는 화려한 이력도 있다. 그런데도 뒤늦게 한국에 선보이게 된 건 작가가 비교적 생소한 핀란드 출신이라는 점과 무관치 않은 듯 하다.

 소설이 그려낸 이집트는 학습 효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혹적이다. 때는 람세스 2세가 태어나기 수 백 년 전인 3500여 년 전이고, 이제 주인공은 파라오가 아니라 의사다. 성경의 모세처럼 갓난 아이 시절 갈대배에 실려 나일강을 떠내려온 출생의 비밀도 있다. 가난하지만 훌륭한 의사 부부 아래서 자란 그는 의학 공부를 시작한 뒤 운명을 바꿀 여인을 만난다. 그러나 푸른 눈의 아름다운 여인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다. 이후 그는 이집트를 떠나 바빌론, 크레타 등 여러 나라를 오가며 변화무쌍한 모험을 펼친다. 그는 의술 덕에 왕들과 친구가 되고, 새로운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주인공과 항상 함께 하는 하인이자 친구인 카프타의 수완도 눈부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주인공이 이집트로 돌아와 보좌하는 파라오 아케나톤의 존재다. 실제 역사상 그는 전통적인 다신교를 부정하는 유일신주의자였고 ‘만인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고 한다. 그는 기존 사제 세력이 반항하자 아예 수도를 옮기기도 했다. 주인공은 다른 이들처럼 아케나톤이 미쳤다고 생각했다가 점차 파라오의 꿈에 동조한다. 이 때문에 소설은 세상 물정 모르던 주인공의 성장기일 뿐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을 꿈꾸던 이들의 이야기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은 난관에 부딪친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들을 잃으며, 사람을 죽이면서 순수했던 과거와 멀어진다.

 영원한 사랑과 화끈한 영웅담을 기대했다면 결말로 갈수록 짙어지는 허무와 고독, 비관주의에 씁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식적인 해피엔딩을 벗어나 환멸과 체념이라는 소설이 발표되던 시대의 감성을 담아낸 것은 미덕이다. 특히 주인공의 모험담과 이국적인 풍광 묘사는 답답한 현대인의 로망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이집트에서 시누헤는 파라오의 비밀을 알게 된 뒤 도망자가 됐다가 금의환향했다는 민간 설화의 주인공으로 비밀, 모험, 로맨스 같은 단어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라고 한다.

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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