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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그사람>21.70년 체전 銀딴 장애인선수 김응룡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1970년10월9일 낮12시.제51회 전국체전 중등부 높이뛰기 결승경기가 열리고 있는 서울운동장.전국에서 모인 건각 12명이 자기 키높이의 장대를 뛰어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이 가운데 소아마비로 왼발을 저는 한 소년이 있 었다.단양중2학년이던 金應龍군.그가 절뚝거리며 뛰어가다 마침내 자기 키보다 높은 장대를 훌쩍 넘자 순간 장내는『장하다』는 탄성과 함께뜨거운 박수가 터졌다.1m58㎝를 뛰어넘음으로써 소아마비를 딛고 체전 사상 처음 은메달을 따는 기 록을 남긴 것이다.7세때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란 그가 온갖 고난을 딛고 이룬 쾌거라 더욱 감동적이었다.
『장애자들도 열심히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지요.다른 장애인들에게 용기를 주고싶었습니다.』 23년이 지난 지금 金씨(39)는 건장하고 활기찬 장년으로 변해 있었다.그는 현재 대전시연축동에 위치한 수자원공사에서 대리로 근무하고 있다.그가 맡고 있는 부서는 댐운영처.댐건설로 인해 수몰된 주민들의 토지를 보상해 주는 일이 그의 주된 업무다.따라서 많은 민원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지방 출장도 잦은 궂은 일이다.
그러나 그는 직장내에서 정상인보다 더욱 합리적이고 원만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또한 쾌활하고 구김살 없는성격으로 상사와 동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당시만 해도 소아마비에 걸리면 가능한 적게 움직이도록 했습니다.저는 선 채로 바지를 입을 수 없을만큼 심했지요.학교에서는 외톨이가 되었고 갈수록 열등감만 쌓여 갔습니다.』 4세때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은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걸어다닐만큼 소심했었다고 한다.그러나 그는 국민학교 4학년때부터 운동을 하기로 결심,구기든 육상이든 닥치는대로 했다.운동에 소질을보인 그는 단양중 시절 높이뛰기 선수로 뽑혔다.처음에는 많은 사람 앞에서 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만둘 생각도했다.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건강하게 자라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를 악물고 달렸다.그는 청주고에 진학해서도계속 높이뛰기 선수로활약,해마다 충북 대표 선수로 출전해 그때마다 금메달에는 못미쳤지만 값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저같은 장애자 선수를 특별히 지도할 교사가 없었습니다.항상혼자 연습했지요.뛰어넘을 때마다 제 그림자를 보면서 자세를 바로 잡았습니다.』 그가 고교 3년때 세운 최고기록은 1m85㎝.비록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금메달과 함께 공동으로 달성한 한국신기록이었다.그는 한때 서울 명문사립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하지만 그는 운동선수로서의 한계를 인정하고 청주대 영문과를 택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직장내 봉사단체인「나눔회」의 총무를 맡아 불우아동을 돕는 사업에도 열심이다.
지난 86년 교사인 李賢俊씨와 결혼,두 아들을 둔 그는 74세된 노모를 청주에서 모시고 살고 있다.
〈李順男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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