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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한복 찾아 오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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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본지 주부통신원들이 매주 돌아가며 생활칼럼을 씁니다. 오지랖 넓은 아줌마의 눈길로 바라본 우리의 가족과 이웃 풍경이 담길 것입니다.[편집자]

지난 해 회갑을 맞은 남편에게 팔순의 친정어머니가 "한복 한 벌을 해주고 싶다"며 두툼한 봉투를 보내 오셨다. 남편은 "일년에 몇 번 입는다고 한복을 하느냐"며 극구 사양했다. 어머니는 "그 바빴던 직장에서 자유로워졌고,며느리 볼 때도 되었으니…"라며 여러 번 권하셨지만 남편은 별로 내키지 않아했다.

그런데 지난 연말. 남편이 갑자기 "장모님이 아껴 두었던 용돈을 선물로 보내주셨는데 무심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한복 맞추러 가자고 앞장서는 게 아닌가.

생전 처음 한복집을 찾은 남편이 한복의 고운 색상과 촉감에 놀라면서 "당신이 고르라"고 미루기에 바느질을 맡기고 왔다.

바로 오늘이 그 한복을 찾는 날이다. 편한 차림으로 나서는 남편의 발걸음에 장난기가 엿보였다. 나도 약간 들떠 있었다. 색상이 잘 어울릴까. 바느질은 곱게 나왔을까. 30여년 전 결혼할 때 해 온 한복을 몇 번 입은 적이 있었지만 기억이 아득하다.

곱게 지어진 한복을 받아 펼쳐보니 참으로 곱기도 했다. 무슨 색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분홍빛 바지저고리와 좀 더 짙은 색 조끼와 덧저고리, 그리고 감색 두루마기와 하얀 동정이 눈부시다.

옷상자를 받아든 남편은 좀 쑥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설빔 받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저고리 소매에 손을 푹 찌르고 배를 내밀고 팔자 걸음을 걸으며 싱글벙글 장난도 쳤다. "아주 좋은데,정말 편안한데"하며 좋아하는 모습이 순진한 새신랑 같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 것을 너무 많이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다. 사는 곳도, 먹을 거리도, 입음새까지 어디 하나 우리 것을 찾아보기 힘든 때, 모처럼 우리 옷을 입고 소년처럼 좋아하는 남편의 모습에서 우리 것의 소중함을 마음 깊이 맛보았다. 사위에게 한복을 선물해 주신 어머니의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제 곧, 설날이 다가온다,

오랜만에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서 반가운 만큼 시어머니.며느리들의 손길이 바쁠 때다. 하루 이틀 몸이야 좀 고단하겠지만, 우리 옷의 넉넉한 품처럼 풍성하고 따뜻하게 가족을 감싸고 싶다.

박복남 (54.명예주부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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