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부모·자식 간에도 그 사람의 용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참 조심스러운 법이다. 하물며 남의 용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분명 결례다. 하지만 그 결례를 무릅쓰고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턱수염에 대해 할 말이 좀 있다.
먼저, 손 전 지사의 측근 중에서는 턱수염이 그에게 부족한 서민적 이미지를 보강해줄 것이라고 했다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서민이라고 모두 허름하고 거친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책상물림들의 자기도취요, 꽉 막힌 우물 안 사고다. 서민들이 진짜 바라는 것은 그저 내 처지, 내 몰골하고 닮은 사람이 아니라 내 처지를 좋게 하고 내 몰골을 환하고 웃게 만들 사람이다.
둘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에이브러햄 링컨이 턱수염을 기르게 된 까닭은 그레이스 베델이라는 11세 된 소녀가 링컨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저씨의 얼굴이 광대뼈가 나오고 턱 선이 너무 길고 뾰족하니 수염을 길러 보세요”라고 권유한 데 있었다. 실제로 그 턱수염 덕분에 링컨의 차가운 인상이 따뜻하고 친근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그 뒤 링컨의 턱수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런데 손 전 지사가 이른바 1, 2차에 걸친 ‘민심 대장정’ 기간 동안 작업복 입고 고추 따고 포도 딸 때야 자연스레 수염 기른 것이 어울릴 수도 있었겠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와 양복 갖춰 입고 온갖 만남과 행사를 치를 때는 왠지 ‘어설픈 시위’처럼 보여 감동은커녕 되레 안쓰러웠다.
셋째, 혹자는 손 전 지사가 경기고-서울대-옥스퍼드대 박사라는 책상물림과 샌님 이미지를 벗으려고 턱수염을 길렀다고도 한다. 하지만 턱수염 기른다고 샌님이 호걸 되나? 심지어 손 전 지사 캠프 안에서 턱수염을 “깎자, 놔두자”하며 논전이 붙었다고도 한다. 정말 그렇게 할 일이 없나. 그럴 시간 있으면 정책연구 한번 더 해야 맞는 것 아닌가. 물론 자기 조직 역량을 집중시킬 만한 곳에 집중 못하게 만든 리더의 잘못이 더 크다.
한때 손 전 지사가 일반 여론조사에서는 지지도가 5% 선을 넘지 못하는 와중에도 유독 대학교수·언론인·기업인 등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 계층에서는 가장 앞선 지지를 보였던 적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하나다. 손 전 지사가 경기지사 시절 보여 줬던 실질적인 비즈니스의 성과 때문이다. 외국에 나가 자본 끌어오고 공장 유치하며 세련되게 실적으로 승부하던 그 모습에 점수를 줬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손 전 지사는 뭘 하고 있나? 어설픈 턱수염으로 위장한 얄팍한 서민 이미지로 승부하려는 것인가. 어림없는 일이다. 그나마 손 전 지사가 9일 대선 출마 선언의 성격을 띤 ‘비전 선포식’을 갖고 턱수염도 깎는다고 한다. 늦었지만 잘한 결정이다. 이제 턱수염 깎고 맨 얼굴로 국민 앞에 서라. 스스로 석연찮은 탈당의 도덕적 부채도 지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라. 특히 지난 대선 당시 흑색선전의 주범을 상황실장에 앉힌 것이 턱수염을 깎으면서 함께 밀어내야 할 비양심의 털임도 잊지 마라. 나는 수염 없는 맨 얼굴의 손 전 지사의 행보를 끝까지 지켜볼 참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