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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의 턱수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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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10여 년 전 여름 한 철 동안 수염을 길러본 적이 있다. 제법 긴 여행을 하던 중에 깎는 것이 번거로워 내버려두니 자연스레 수염이 길러졌고 그것을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한동안 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넌지시 “추석 전에는 깎을 거지?” 하시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잔소리가 아예 없으시던 어머니가 그 정도로 말씀하신 것은 그 수염이 몹시 마음에 걸리셨다는 얘기다. 그 한마디를 듣고 나는 그날로 수염을 깎았다. 어머니는 그 뒤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지만 내심 수염 깎은 나를 더 반기는 분위기였다.

사실 부모·자식 간에도 그 사람의 용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참 조심스러운 법이다. 하물며 남의 용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분명 결례다. 하지만 그 결례를 무릅쓰고 손학규 전 경기지사의 턱수염에 대해 할 말이 좀 있다.

먼저, 손 전 지사의 측근 중에서는 턱수염이 그에게 부족한 서민적 이미지를 보강해줄 것이라고 했다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서민이라고 모두 허름하고 거친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책상물림들의 자기도취요, 꽉 막힌 우물 안 사고다. 서민들이 진짜 바라는 것은 그저 내 처지, 내 몰골하고 닮은 사람이 아니라 내 처지를 좋게 하고 내 몰골을 환하고 웃게 만들 사람이다.

둘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에이브러햄 링컨이 턱수염을 기르게 된 까닭은 그레이스 베델이라는 11세 된 소녀가 링컨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저씨의 얼굴이 광대뼈가 나오고 턱 선이 너무 길고 뾰족하니 수염을 길러 보세요”라고 권유한 데 있었다. 실제로 그 턱수염 덕분에 링컨의 차가운 인상이 따뜻하고 친근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그 뒤 링컨의 턱수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그런데 손 전 지사가 이른바 1, 2차에 걸친 ‘민심 대장정’ 기간 동안 작업복 입고 고추 따고 포도 딸 때야 자연스레 수염 기른 것이 어울릴 수도 있었겠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와 양복 갖춰 입고 온갖 만남과 행사를 치를 때는 왠지 ‘어설픈 시위’처럼 보여 감동은커녕 되레 안쓰러웠다.

셋째, 혹자는 손 전 지사가 경기고-서울대-옥스퍼드대 박사라는 책상물림과 샌님 이미지를 벗으려고 턱수염을 길렀다고도 한다. 하지만 턱수염 기른다고 샌님이 호걸 되나? 심지어 손 전 지사 캠프 안에서 턱수염을 “깎자, 놔두자”하며 논전이 붙었다고도 한다. 정말 그렇게 할 일이 없나. 그럴 시간 있으면 정책연구 한번 더 해야 맞는 것 아닌가. 물론 자기 조직 역량을 집중시킬 만한 곳에 집중 못하게 만든 리더의 잘못이 더 크다.

한때 손 전 지사가 일반 여론조사에서는 지지도가 5% 선을 넘지 못하는 와중에도 유독 대학교수·언론인·기업인 등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 계층에서는 가장 앞선 지지를 보였던 적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하나다. 손 전 지사가 경기지사 시절 보여 줬던 실질적인 비즈니스의 성과 때문이다. 외국에 나가 자본 끌어오고 공장 유치하며 세련되게 실적으로 승부하던 그 모습에 점수를 줬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손 전 지사는 뭘 하고 있나? 어설픈 턱수염으로 위장한 얄팍한 서민 이미지로 승부하려는 것인가. 어림없는 일이다. 그나마 손 전 지사가 9일 대선 출마 선언의 성격을 띤 ‘비전 선포식’을 갖고 턱수염도 깎는다고 한다. 늦었지만 잘한 결정이다. 이제 턱수염 깎고 맨 얼굴로 국민 앞에 서라. 스스로 석연찮은 탈당의 도덕적 부채도 지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라. 특히 지난 대선 당시 흑색선전의 주범을 상황실장에 앉힌 것이 턱수염을 깎으면서 함께 밀어내야 할 비양심의 털임도 잊지 마라. 나는 수염 없는 맨 얼굴의 손 전 지사의 행보를 끝까지 지켜볼 참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