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내가 연다] 5. 연극 양정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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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스펙터클한 연극이 좋아요. 많은 사람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무대 위에 나오는 거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그의 말대로 '돈이 없어서' 그간 일련의 작품을 쪼그라지게 했다. 머릿 속엔 5백석 이상 되는 중극장용 '대작'을 그려놓고도 실제론 1백석 미만의 소극장에 소품을 올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 극단대표로 해외에도 눈길

그런데 소극장에 갇혀 있던 그가 올해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게 됐다. 오는 3월 LG아트센터에서 연극 '환(幻)-맥베스'를 올리게 된 것이다. '환(幻)-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한국적 시각으로 바꾼 작품. 지난해 대학로 소극장에서 소품 형식으로 선을 보였다.

"시원하게 넓은 무대에 시각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보여줄 작정입니다. 가령 맥베스가 왕을 칼로 찌르는 장면에선, 칼 대신 물이나 천을 사용해요. 왕의 얼굴을 물로 씻어내거나, 거대한 붉은 천을 깔아서 '죽음'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거지요. 생각만 해도 즐겁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한 여름 밤의 꿈' '환(幻)' 등 그가 내놓은 일련의 작품들이 말하듯 그는 셰익스피어의 적자다. "셰익스피어만큼 웃기고, 철학적이고, 감동적인 글을 쓴 작가는 드물다"고 칭찬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찬미하고 따라하는데 그치지는 않는다. 극단 여행자의 대표적 레퍼토리가 된 '한 여름 밤의 꿈'을 보자. 그는 요정과 인간 사이에 얽히고 설킨 사랑 이야기를 한국의 도깨비 버전으로 확 바꿨다. 여기에다 무대 위에 배우들을 다 모아놓은 뒤 연기하고 춤추고 노래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의 연극을 내놓았다.

*** 셰익스피어 작품 재창작

"더러는 사람들이 제 작품을 폄하하기도 합니다. 남의 작품을 번안하는 수준이라고요. 저는 셰익스피어의 힘을 빌렸을 뿐 작품을 재창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유독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 인간만큼 드라마틱한 소재는 없다며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한다. 그가 말한 '스펙터클한 연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거기에다 코미디는 양념으로 뿌려진다. "인간이 처한 상황 자체가 웃기기 때문"이란다.

올해 '환(幻)'을 대극장에 올린 후에 그는 해외로 눈을 돌릴 생각이다. 극단 여행자가 지난해 9월 이집트 카이로국제실험연극제에서 '연(緣)-카르마'로 대상을 탄 사건(!)은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됐다. "여행자의 이름을 봐도 알겠지요? 처음부터 우리는 외국시장을 염두에 뒀습니다. 마임이나 이미지극을 근간으로 하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카이로에서 외국인이 환호하는 걸 보면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현재 여행자의 작품은 베를린 페스티벌(5월).폴란드 말타 페스티벌(6월). 콜롬비아 연극 페스티벌(가을)에 초청받았다.

돈 때문에 대극장용 작품을 소극장에 올려야 했던 그는 올해 소원을 풀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고민거리, 그것은 극단 여행자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다. "3년 전 각자의 생계를 위해 극단을 해체한 적이 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아파요. 단원들이 편하게 연극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요. 그러려면 대박이 나야 하는데…."

*** 인간이 가장 극적인 소재

누가 이 젊은 연출가에게 때가 묻었다고 말할 수 있으랴. 그는 극단을, 더 나아가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했다. "여행자는 하루에 한번만 공연합니다." 주말 2회 공연을 하면 한 회는 분명 질이 떨어진다며 1일 1회 공연을 고집하는 그의 고집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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