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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몸으로 싸우는 21세기 카우보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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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12면

크리스마스만 되면 테러리스트와 사투를 벌여야 했던 존 매클레인(브루스 윌리스)에게 다시 악운이 닥쳐왔다. 이번에는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새로운 적은 미국의 전산망을 해킹하여 교통·금융·전기·가스 등 모든 기반시설을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사이버 테러리스트.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세상은 바뀌었지만, 존 매클레인이 싸우는 방식은 동일하다. 여전히 존은 죽도록 고생하면서 육체의 힘만으로 싸운다.

12년 만에 돌아온 ‘다이하드 4.0’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다이하드’ 시리즈는 액션영화의 최고봉으로 꼽힐 만한 작품이다. ‘붉은 10월’과 ‘프레데터’를 만들었던 존 맥티어넌 감독은 ‘다이하드’를 미국의 새로운 영웅담으로 탄생시켰다. ‘다이하드’가 나온 것은 1988년이었다. 당시 미국의 80년대는 경제 침체기였고, 전통적 산업인 철강과 자동차 등이 쇠락하며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미·소 냉전의 저울은 미국으로 기울어졌지만 생활고에 지친 미국인의 자존심은 조금씩 상처받고 있었다. ‘다이하드’의 무대는 일본인이 소유한 첨단기술의 나카토미 빌딩이고, 빌딩을 공격한 테러리스트는 독일인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인이다. 미국 영토 안에서도, 미국인은 단지 인질로만 쓸모가 있다. 치욕적인 상황에서 존 매클레인은 홀로 전쟁을 시작한다.

80년대를 대표하는 영웅은 단연 아널드 슈워제네거와 실베스터 스탤론이었다. 실베스터 스탤론의 ‘록키’와 ‘람보’는, 1편에서는 보통 사람의 영웅이었다. 록키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우는 빈민층의 권투선수이고, 람보는 베트남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오히려 냉대와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아웃사이더였다. 그러나 2편을 거치면서 80년대의 록키와 람보는 모두 냉전의 우위를 과시하는 수퍼히어로가 된다. 아널드 슈워제네거 역시 ‘터미네이터’나 ‘코만도’ 등에서 도저히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내 가족은 내가 지킨다
반면 존 매클레인은 평범한 소시민이다. 뉴욕 경찰이니 기본적인 전투력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존은 결코 수퍼히어로가 아니다. 게다가 천방지축인 성격 때문에 경찰 내에서 외톨이 신세고, 가정에서도 능력이 좋은 아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별거까지 하고 있다. 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엄청난 근육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영웅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이하드’에서 존 매클레인이 구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아내일 뿐이다. 단,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구해야 한다. 최소한의 정의감이 그를 진정한 영웅으로 만든다. 그러나 테러리스트들만이 아니라 바깥의 경찰들도 그를 믿지 않는다. 그는 철저하게 외톨이로서 싸워야만 한다. 무전기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유일한 동료는 힘없는 약자인 흑인 경찰뿐이다. ‘다이하드 3’에서도 빈민가의 흑인 교사 하나와 힘을 합치는 정도다. 존 매클레인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테러리스트와 싸우지만, 그의 본질은 보통 사람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잠시 영웅이 될 뿐이다.

존 매클레인이 사랑을 받은 것은 그가 전형적인 미국 영웅이기 때문이다. 존은 수퍼히어로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영웅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외부에서 침입한 적과 싸운다. 철저히 고립된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의 힘만을 이용해 승리를 거둔다. 그것은 자기 혼자의 힘으로 가족을 지켜야만 했던 서부극의 영웅과 동일한 이미지다. 존 매클레인은 현대의 카우보이인 것이다. 다만 2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존에게도 변화가 조금은 있었다. 특히 ‘다이하드3’에서 존 매클레인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직장에서도 독불장군으로 찍힌 낙오자로 몰락한다. 그건 ‘다이하드’ 이후 하락 일변도였던 존 맥티어넌의 처지도 반영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히어로
다행히 ‘다이하드 4.0’의 존 매클레인은 명예를 회복한다. 하지만 시작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엄마와 함께 사는 딸은 존을 스토커 취급한다. 여전히 존은 가족의 일부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이버 세계가 지배하는 21세기의 존은 아웃사이더 정도가 아니라 원시인 같은 존재다. 테러리스트가 나타났다는 것은 알지만, 대체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존은 알 수가 없다. ‘파이어 세일’이 무엇인지, 테러리스트의 공격 목표가 무엇인지 존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철부지 해커인 매튜 페럴이 없다면 존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존은 매튜의 지시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며 나타나는 적을 물리치고, 그를 보호하는 것뿐이다. ‘다이하드 4.0’은 그 제목처럼, 이미 우리가 디지털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매튜와 존은 상호 보완관계다. 그것은 이전 ‘다이하드’ 시리즈에서 나왔던 파트너십과는 또 다르다. 과거의 파트너들은 그저 마음의 위안이 되는 동료일 뿐 필수불가결한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매튜가 없다면, ‘다이하드 4.0’의 존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날로그 액션이 필요하긴 하지만, 디지털 세대의 목표 확인이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세대의 액션영화 ‘언더월드’를 만들었던 렌 와이즈먼이 연출한 ‘다이하드 4.0’은 20년이 된 하드웨어에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장착해 날렵하게 변신한다. 본질이 변한 것은 없다. 존 매클레인은 여전히 외톨이이지만 가족을 위해 싸우고, 강자를 조롱하는 입심으로 쉴 새 없이 떠벌리고, 헌신적인 액션으로 관객을 감동시킨다. 변한 것은 환경일 뿐이다. 사이버 세계와 현실의 차이를 간과했던 매튜는 존을 통해 현실의 무게를 실감하고, 딸인 루시 매클레인은 아버지 존이 영원한 영웅임을 깨닫는다. 새로운 세대가 존을 인정하고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다이하드 4.0’은 막을 내린다. 그것은 가장 낙관적인 결말이자 보수적인 결론이다. 별다른 불만은 없지만, 그 이상의 감흥 또한 없는. ‘다이하드 4.0’은 그동안 ‘다이하드’ 시리즈가 보여준 모든 것을 집대성한 완결편으로 훌륭히 자리를 잡는다. 혁신적이면서도 안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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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씨는 영화ㆍ만화ㆍ애니메이션ㆍ게임ㆍ음악 등 대중문화 전반을 투시하는 전방위 평론가로 ‘B딱하게 보기’를 무기로 한 ‘봉석 코드’의 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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