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양심 지키는「고독한 성직」-대법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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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법관 최고의 영예직인 동시에 존엄성과 양심의 상징인 대법관은「사법부의 성좌」로 불린다. 최고법원의 법관으로서 엇갈린 법령해석을 통일하고 하급심을 구속하는 판례를 만든다는 점에서는 법치사회를 실현하는 최후의 보루이기도 하다.
대법관은 장관급 대우를 받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기에 영광스런 자리임에는 분명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과중한 업무를 견뎌내고 어떤 유혹과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흔히「고독한 성직」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대법관이라는 직책에 대해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높은 기대는 문민정부 개혁작업의 성패를 가름할 사정활동의 책임자인 감사원장에 이회창 대법관이 임명되자 국민들이 보여준 깊은 신뢰와 안도감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고 있다.

<고뇌와 좌절 거듭>
국민들은 약자편에 선 소신있는 판결로 정평이 난「소수의견 판사」이며『통치 행위라도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면 사법심사의 대상이 돼야한다』는 사법 적극주의자인 이대법관이 중책을 맡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부의 강력한 부패척결 의지를 확신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많은 법조인들은 91년8월15일 지병인 당뇨병으로 타계한 배석대법관을 깐깐하면서도 고지식한 완벽주의자로 한평생을 살다간 선비의 표본이라고 말한다.
과로를 피하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병임에도 몸을 아끼지 않다가 쓰러진 그의 엄숙한 태도를 두고 어떤 이들은『생명을 깎아 판결문을 썼다』고까지 표현했다.
대법관들이 살인적인 격무에 초인적인 인내력을 갖고 맞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그러나 파란 많은 한국현대사는 대법관을 역사앞에 무한책임을 지는 고고한 지사로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치권력의 부당한 간섭과 국민들의 불신사이에서 대법관들이 끝없는 고뇌와 좌절을 거듭해온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역사상 대법원이 가장 많은 수난을 당한 시기는 3공에서 5공에 이르기까지의 30년 가까운 기간이다. 정치권의 외풍으로 대법관이 무더기 경질되는 파동이 시작된 것은 71년 국가배상법 위헌판결 사건이었다.
당시 월남전에 참전했던 전상자와 가족들은 노동력 상실에 따른 생활보장을 요구하며 국가를 상대로 잇따라 손해배상청구를 제기했다.
그러나 국가배상법은 군복무중 사고를 당한 군인·군속의 청구권을 제한해 이 법의 위헌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국가이익이 먼저">
대법원은 71년6월22일 2년여동안 논란을 벌여온 국가배상법 사건을 민사부로부터 전원합의체로 회부, 대법원판사 16명의 표결끝에 9대7로 위헌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평소『대법원장이 20명도 안되는 부하 통솔조차 못한다』고 불만을 터뜨렸던 박정희 대통령은 민복기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전원을 청와대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두 법원이 모든 판결을 행정부에 유리하게 내려 줄 수야 없겠지만 한해에 5∼6건 정도는 국가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판결해달라』고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결국 이 판결은 같은 해 7월 검찰에 의해 현직 판사 2명의 영장이 청구되는 71년 사법파동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듬해에는 10월유신이 단행됐고 73년3월24일 유신헌법에 따른 전국 법관의 재임명과 보직개편 과정에서는 방순원·김치걸·사광욱·양회경·나항윤·홍남표·한봉세·손동욱·유재방 대법원판사 등 위헌결정을 내린 9명 전원이 탈락했다. 이 판결의 여파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유신헌법에서 대법원의 위헌심사권이 헌법위원회로 넘어가 대법원의 권한이 축소됐던 데서도 학인 할 수 있다.
80년5월 박대통령 시해사건의 김재규등에 대한 상고심도 정치권력의 악력이 사법권을 유린했던 사례로 기록된다.
신 군부측은 속전속결로 재판이라는 요식절차를 끝내고 김을 처형하려 했으나 심리과정에서는 김에게 내란죄를 적용하는 것은 법리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개진됐다.
양병호 대법원판사는『하급심에서 김재규등 피고인들이 유신체제를 강압·변혁하려는 목적으로 박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인정했지만 소송절차로 볼 때 개헌이라는 전 국민적 합의가 있은 후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 범행시와 재판시의 체제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명백하다』며『따라서 달라진 정치상황을 무시하고 피고인을 내란죄로 처벌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법리를 폈다.
임항준 대법원판사는『국민의 인권을 유린하고 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케 하는 내용으로 돼있는 실정법을 거부할 수 있는 저항권은 헌법에 명문화 돼있지 않더라도 일종의 자연권으로 인정돼야 한다』며 피고인들의 행위를 저항권의 일부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신군부는 즉각 재판에 개입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겸 합동수사본부장은 이영섭 대법원장의 공관을 찾아가『재판이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압력을 넣었고 이학봉 보안사정보처장은 양 대법원판사를 찾아가 회유했다.
당시 신군부 세력의 핵심 멤버들은 대법관들에게『젊은 장교들이 대통령을 살해한 역사의 죄인 김재규에 대한 재판이 지연되자 대법원을 탱크로 밀어 버리자는 과격한 언동을 하고 있다』는 말로 군부의 분위기를 전달하며 노골적인 협박을 계속했다.
이 사건 심리는 전원합의체로 넘겨졌고 대법관들의 표결 결과 9대6으로 김의 사형을 확정하는 상고 기각판결이 내려졌다.
계엄당국은 사회에 혼란을 준다는 이유로 소수의견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했다. 소수의견을 냈던 6인중 양병호·민문기·임항준·김윤행·서민탁 대벅원판사등 5인은 석달뒤인 80년8월 강제로 사퇴 당했고 이듬해인 81년4월 대법관 개편에서는 정태원 대법원판사까지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강제사퇴 수모도>
대법관들은 81년 금대중내란음모사건의 상고심에서도 원심인 군법회의의 판결과 다른 의견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수사기관에 연행돼 조사를 받기까지 했으며 법관숙정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이처럼 격무와 갈등의 2중고를 겪으면서도 대부분의 대법관들은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대쪽같은 기개와 높은 도덕성, 청렴한 사생활로 사법부의 명예와 긍지를 지켜왔다.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노선생은 6·25 동란으로 부산으로 천도하게 되자『정부가 피난 다니는 판에 마누라를 데리고 다닐 수 없다』며 부인을 고향인 전북 순창에 내려보냈는데 부인은 결국 인민군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방순원 대법원판사는 대법원장이 예산집행을 하고 남은 돈을 대법관들에게 수당으로 나눠주자 재량권 남용이라며 되돌려주기도 했다. 그는 평판사시절 도배할 돈이 없어 신문지로만 도배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는데 쌀이 떨어져 부인이 동료 법관집으로 쌀을 꾸러 갔더니 그 집에도 역시 쌀이 떨어져 부인끼리 서로 붙들고 울었다는 일화도 있다.
국민들은 사법부가 정치권력에 의해 수난을 당하던 암울한 시절을 지나 문민시대를 맞이한만큼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이제는 보다 능동적이고 소신있는 판결로 적극적인 법률 창조 기능을 수행하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대법원이 기득권세력과 권력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보수성과 폐쇄성을 스스로 벗어 던지고 사회변화를 호흡하며 시대의 요구를 수용하는 사명의식을 회복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이하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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