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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 등 불우이웃 돌보기 50년|김용성씨 <사회사업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50년간 사회복지분야 외길을 묵묵히 걸어온 사회사업가 김용성씨(75).
함북 웅기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특허를 따 큰돈을 거머쥐었던 과학기술자 출신이다.
국내 사회사업가로는 처음 일본인이 만든 영화 「나자레의 사랑」(l시간30분짜리)에 주인공으로 등장했고, 감동을 받은 그들에 「김용성 후원회」 (회원 약 5백명) 까지 결성토록 한 국제적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도 일제 때 한국인과 결혼, 돌 볼 사람이 없는 여성을 수용하는 나자레원·민제양로원, 남부종합노인복지관 등 10곳 시설의 이사장으로, 중국 하얼빈의 「명화조선족 경로원」 의 후원자로 여전히 활동중이다.
일본 마쓰시타 전기가 제정한 국제봉사상 제1회 수상자 (91년), 호암상 (93년) 수상자이기도 한 그에게 경제철학이랄까, 그런 것이 있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뿐이다.
어머니를 네 살 때 여의고 아버지의 소련 망명으로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랐던 그가 불우이웃에 대한 평소의 관심을 행동에 옮길 수 있게 된 것은 43년 벗 나무 껍질로 만드는 「데레삥유」라는 발화력이 높은 기름을 개발, 특허를 따 생산업체들로부터 매출액의 0·5%를 받기 시작하면서다.
일본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뒤 만주국의 대륙화학원에 들어가 일하며 손에 쥔 돈으로 함북회령에서 44년부터 양로원과 고아원을 운영하다 해방 후 북한당국에 모두 뺏기고 옥살이도 했다.
처남에게 사주었던 원양어선 2척을 타고 친척들과 함께 6·25 때 경주로 월남한 그는 서울 집과 배를 몽땅 팔아 경주에 산 1백20만평의 땅을 밑천으로 남한에서 제2의 사회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2남2녀 중 장남과 2녀를 서울시립대 공대 교수와 과학자로, 2남을 사회사업가로 키운 그는 부인 유금순씨(74)와 함께 경주 성애원에서 방 두칸 10평에서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늙은이들에게는 너무 넓다』고 했다. <김영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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