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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양 허 퇴진 "도화선"|이-장 사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누가 10억 원을 갖고 있더라는 소식이 들리면 밥 먹다가도 숟가락 팽개치고 달려가는 게 은행장의 속성입니다. 그 전주가 노인이든 새파란 젊은이든, 남자든 여자든 일단 머리 조아리고 통사정을 해야지요. 행장부터 발벗고 나서지 않으면 치열한「자원조성(예금 끌어들이기)」경쟁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게 마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 없어요. 지난번(92년)상업은행 지점장 자살사건도 결국은 같은 맥락 아닙니까.…그런데 그날「2백억 원을 예금하겠다」는 제의를 받으니 정말 눈이 번쩍 뜨입디다. 단 한 건에 2백억 원이라면 아주 드문 경우였거든요.』
지난 81년께 호텔롯데 일식 집에서 장영자 여인(당시 37세)을 처음 만났다는 한 전직은행장의회고담.
그는 이날 중앙정보 부 근무시절 이철희씨(중정차장 출신)의 부하였다는 한 국회의원의 소개로 이철희·장영자 부부를 만났다. 그 국회의원은『은행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은근히 귀띔해 주었다.

<"한번에 2백억 예금">
『장 여인이「행장인데도 상당치 젊네요』라고 치켜 세우 길래 당시 50전이던 나도「너무 젊어 죄송합니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엔 분위기가 괜찮았지요. 2백억 원 얘기가 나와 아예 반색했는데, 장 여인이 그 대신에…하며 꺼낸 예금조건이 문제였어요.』
장영자씨가 내건 조건은「2백억 원을 당장 예금해 줄 테니 대신외환은행 뉴욕지점을 통해 미화2처만 달러 가량을 인출하도록 주선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딘가 석연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방식의 거래는 똑 떨어지는 외환관리법 위반이었다.
『상담을 계속하려면 그쪽에서 벌이려 한다는 사업을 검토해야 했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내가 난색을 보이니까「그럼 달러를 얼마나 인출할 수 있으세요』라고 묻더군요.「교포정착자금이라는 게 있습니다. 현지 지점장의 재량으로 대출이 가능하지요. 한도액은 2만 달러입니다」라고 잘라 말했지요.「행장 님. 나를 히야카시 하는군요」라고 한마디합디다. 그쯤이면 얘기는 끝난 것이었어요. 동창회에 가 봐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도중에 자리를 나와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다음해 이·장 사건이 터질 때까지 한동안은 「굴러 들어온 호박을 차 버린 무능한 행장」이라는 시선도 받았습니다만 결국은 내 판단이 옳았던 겁니다.』
82년 정국을 뒤흔든 세칭 이-장 사건은 여러 가지 면에서「단군이래 최대…」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일대 파란을 불렀다.
당시 검찰발표에 따르면 이들 부부가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업들에 현금을 빌려주고 대신 갑절로 받아 낸 어음의 총액은 연 7천1백11억 원이었다. 이중 6천4백4억 원 어치가 할인 사용됐다고 검찰은 발표했다. 5공 신 군부가 독하게 마음먹고 잡아들인 3, 4공화국의 대표적 「부정축재자」10명의 총 축재 액은 불과(?) 8백53억 원. 이들 부부가 1년 남짓한 기간 중 주무른 돈은 그 열 곱에 가까웠다. 앞서 언급한 은행장은 범의 입에서 용케 빠져 나온 경우였지만 사건의 여파는 다른 은행장 2명과 기업체간부, 전직기관원, 급기야 대통령의 처삼촌에 이르기까지 30여명을 줄줄이 오랏줄에 엮어 놓았다. 포항제철 다음가는 규모이던 일신제강과 도급순위 8위이던 공영토건이 무너졌고, 두 차례에 걸친 개각으로 고관현직들도 추풍낙엽 신세를 면치 못했다.
증언들을 종합하면 사건의 기미를 가장 먼저 감지한 곳은 청와대 민정비서실이었던 듯하다.

<민정비서실 첫 감지>
당시 비서실 관계자 A씨의 말.
『82년 초 민정비서실에 이-장 부부에 관한 첩보가 들어왔어요.「롯데빌딩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바쁘게 움직이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정수석(이학봉)이 안기부에 통보해 주었지요. 얼마 후 유학성 안기부장으로부터 받은 답변은「별것 아니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정 쪽에서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두 달쯤 지나서 안기부에서「그게 아니다. 문제가 심각할 것 같다」고 뒤늦게 의논해 오더군요.』
A씨에 따르면 안기부는 불과 몇 달 후 나라 안팎을 온통 뒤흔들 사안을 사전제보 받고도 대수롭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뜻이 된다. 당시 수사에 관여했던 검찰의 한 고위간부는『이철희가 중정 간부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나중에 구속 자에도 포함되었듯이 안기부직원이 사건에 연루되었던 점 등으로 인해 오판을 하게 된 것 같다』며 A씨의 말을 뒷받침했다. 그의 설명.
『검찰은 82년 4월 공영토건 측에서 어음사기를 당했다며 낸 진정서에서 처음으로 사건을 인지했어요. 초동단계에서는 사건이 그토록 커질 줄은 정말 짐작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내사해 보니 관련된 기업이 공영토건 하나가 아니더군요. 이거 큰일이다 싶어 애초에는 대검중수 부 2과(경제담당)에 맡겼던 사건수사를 확대해 중수 부 다른 과의 베테랑들과 서울지검, 산하지청 검사들까지 동원하게 된 겁니다. 이·장 부부는 우선 가택수사에서 나온 미화 40만 달러를 걸어 구속해 놓고 수사를 진전시켰지요. 수사 중 알게 된 건데, 우리가 처음 손댄 것이 아니라 이미 몇 달 전 안기부에서 이씨 부부 주변을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당시 안기부장이던 유학성씨(현 민자당 의원)측은『그 사람들이 뭘 잘못 알고 있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유씨의 한 측근은 이렇게 설명했다.

<명성사건 얽힌 장인>
『안기부는 사건이 터지기 1년 전부터「이·장부부가 대통령의 친척을 팔고 다니며 문제를 일으킨다」는 내용을 청와대에 보고하고 있었어요. 유 부장 본인은 82년 들어 사건이 터지고 나서「영부인(이순자 여사)도 자중해야 한다」고 진언한 뒤 부장 직을 떠나게 됐지요. 그후 반공연맹이 사장 직을 맡기까지 1년 반 가량을 쉬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씨 측의 설명에 대해 A씨는『그쪽에서는 이·장사건과 명성사건(83년)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A씨의 증언.『이·장사건과 달리 명성사건은 안기부에서 오래 전부터 파악하고 있던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대통령도 장인(이규동씨)과 김철호(명성그룹회장)의 관계에 대해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소상히 알고 있었어요. 먼젓번(이·장 사건) 은 대통령의 처삼촌이었지만 이번에는「장인어른」이라 안기부도 대단히 예민할 수밖에 없었지요. 청와대비서전이나 안기부가 대통령의 윗사람에 대해 진상을 물어 보기 껄끄러워 하자 어느 날 전대통령이 직접 장인을 불러 질문을 했습니다.「진짜 김철호 라는 자한테 뇌물 받은 일 있습니까」라고요. 이규동씨는「뇌물은 무슨…그냥 아들 같은 참한 청년이 내게 잘 대해주길 래 자주 놀러 간 거지 뭐」라고 대답했다지요. 대통령은 그때 장인이 김철호에게 얹혀 다니며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고 안무혁 국세청장을 불러「아무래도 이상하다.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무려 넉 달 가량이나 추적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무튼 고생고생 끝에 찾아낸 것이 상업은행 혜화동 지점의 부정계좌였어요. 명성사건은 수사자체가 대통령의 지시가 발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장 사건은 경위가 다릅니다.』경위야 어쨌든 이·장 사건은 당시 청와대의 권력구조 변동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허화평·허삼수라는 두 막강한 수석비서관의 위력이 이 사건을 계기로 몰락으로 치닫기 시작한 것이다. 대통령의 장인을 구속시키는데 이 두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추측이다. <26면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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