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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해를 맞으며|이나미<신경정신과 전문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연말에는 모두 부산스럽고 바빴다. 뱃속의 암 세포같이 거리를 야금야금 살해하는 자동차들, 연하장과 달력의 홍수, 흥청망청 망년회, 냄새나는 술자리와 파티들…. 휴거를 앞둔 종말 론 자들 혹은「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며 쫓기는 탈옥수인양, 사람들은 밤새워 먹고 마시며 떠들고 배설했다.
소돔성의 마지막날이 지나고 단지 달력이 한 장 바뀌었을 뿐, 모든 것이 어제와 똑같은 새해 아침. 눈부신 정적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거리 풍경. 마치 한해동안 찢기고 더럽혀져 상처뿐인 도시가 고통에 못 이겨 우리에게 작은 반란이라도 일으킨 듯.
인파가 빠져나간 거리에 평화롭게 한복을 차려 입은 가족들의 조촐한 설 나들이와 꿈을 파는 영하 관을 찾는 자유로운 젊은 남녀들의 모습에서,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어린이들의 설렘에서, 그래도 세상은 아직까지 살 만하다는 희망을 읽을 수 있다.
해를 넘기며 아이가 물었다.
『엄마. 다시 92년은 오지 않는 거야?』『그래. 이제부터는 1993년이야』라는 대답에, 아이는『안녕, 92년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대. 난 지금부터 93년과 살아야 해』하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날짜와 시간 같은 개념들을 복잡하게 만들어 한해를 결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과오와 실수들을 병든 과거의 무거운 어깨에 날름 얹어 버리고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 양 가장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올 한해동안 나는 어떤 잘못을 얼마나 많이 저질러 버릴까. 누군가를 미워하는 죄, 게으름을 피우는 죄,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히는 죄, 거짓말과 위선의 죄, 내 안팎을 모두 부끄럽게 만들며 자신을 포박하는 어처구니없는 말과 행동들. 그것들을 모두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충만한 기쁨으로 또다시 내일을 열게끔. 새날, 아이처럼 새롭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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