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사장 죽음부른 「외면」/정철근 경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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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통령선거의 열기로 온나라가 후끈 달아오른 가운데 남산 한 구석에선 빚에 몰리다 못한 한 중소기업인이 목을 매 숨긴채 발견됐다.
구천수 한국기체공업사장. 기자는 6개월전 그를 취재하기 위해 만난적이 있다. 그때는 부도위기에 몰린 기업주로서가 아니라 국민은행이 제정한 올해의 우수중소기업 대상 수상자로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91년에 30억원정도 하던 매출액을 올해는 1백억원 정도로 늘려 잡고 있을 정도로 급성장가도를 달리던 그가 불과 몇개월만에 제품개발에 들인 투자비 때문에 부도가 나 결국 자살이라는 극한 선택을 내리게 된 것이다.
물론 기업이 부도가 나는 것은 흔한 일이고 이번 경우에도 매출이 30억원밖에 안되는 작은 회사가 70억원이나 되는 빚을 끌어들여 투자한 것은 너무 무리를 한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기자가 만나본 구 사장은 공인회계사 출신으로 주로 관리·경리분야에서 잔뼈가 굵어온 사람답게 꼼꼼히 앞뒤를 챙기는 스타일이었다.
대기업 중역자리를 뛰쳐나와 창업하고,기술개발을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놓을 때마다 수없이 손익계산서를 그려보았을 것이다.
인터뷰중에 그는 『평생 샐러리맨 생활만 하다 내장사를 하려니까 힘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며 『처음에는 기술만 개발하면 모든게 해결될줄 알았는데 일을 벌여놓고 보니 연구개발비와 시설투자비가 예상보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들어간다』고 창업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구 사장은 중소기업을 경영하며 어려움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가 국내 최초로 개발하기는 했지만 대기업계열의 자동차부품회사가 곧 이 시장에 뛰어들 전망이라 국내판매가 수월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구 사장의 자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자기사업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이 과잉투자를 하다 낭패를 본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상공부 유망중소기업으로 선정돼 50억원이나 되는 은행빚을 끌어다 썼으면 혜택도 많이 본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국내 대자동차회사들이 외제보다 가격조건이 좋은데도 구매를 기피했다는 한 직원의 주장은 구 사장이 자살까지 하게된 원인을 어느 정도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적지않은 자금과 열정을 쏟아넣어 제품을 연구·개발해도 국내기업에 의해 외면당하고,이같은 사실이 정책당국에 의해 역시 외면당하는 오늘의 중소기업 풍토와 현실이 계속되는 한 제2의 구씨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게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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