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딛고 일어서는 쌍둥이 배우 같은 얼굴 다른 연기 보여드릴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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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운전사’아버지의 하루는 늘 신새벽에 열렸다. 싸~아한 공기를 마시며 청과물을 싣고 가락시장으로 향했다. ‘두탕’ 뛸 때쯤에야 먼동이 희부옇게 터 왔다. 그렇게 밤을 낮 삼아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가난의 넝쿨은 질기고도 질겼다. 집이라곤 13평짜리 단칸방이 전부였다. 부모와 세자매, 다섯식구는 바짝 살을 맞대고 칼잠을 자야 했다. 심지어 어머니는 방문 앞에서 쪼그려 자기 일쑤였다. 끼가 넘치던 딸 쌍둥이는 고등학교 시절 무용이 하고 싶었다. 그러나 가난이 이를 가로막았다. 불쑥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연예인이 되자.” 유명해지고 돈도 벌어 효도하기로 작심했다. 콘테스트ㆍ오디션이라면 악착같이 쫓아다녔다. 고 3 때 마침내 꿈을 이뤘다. 드라마 ‘낭랑 18세’에서 주인공 한지혜의 친구로, 서경석ㆍ이윤석의 ‘칭찬합시다’ 보조진행자로 활동했던 쌍둥이 방송인 ‘비류ㆍ온조(26ㆍ본명 이은실ㆍ이은주·서울 송파구 삼전동)’가 연예인이 되기까지의 간추린 여정이다.

◆화려함 뒤의 그늘
탤런트로 데뷔한 뒤 오라는 데가 많았다. 쌍둥이라는 희소성 때문에 인기도 있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3년여가 흘렀다. 길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생활은 자유롭지 못했다. 괜히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고, 행인들이 험담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밖에 나갈 때면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떨구었다.
대학시절도 외로웠다. 방송을 핑계로 수업에 빠지다 보니 친구 사귈 틈이 없었다. 가끔 학교에 가면 주변에서 “뭐가 그리 대단해 학교도 제대로 안 나오느냐. 학생신분은 폼이냐” 라는 둥 비아냥조의 얘기가 흘러나왔다.
연예계 생활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쌍둥이라 겪는 '배역의 한계'는 견디기 힘들었다.
비류는 “방송에서는 둘이 함께 나와 웃겨달라고만 주문했다”며 “‘내면연기를 하고 싶다’고 하면 ‘너희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야’라고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며 당시를 돌아보았다.
 
◆3년여 외도, 때늦은 후회
다시 오기가 발동했다. 박제가 된 이미지를 벗고 싶었다. ‘낭랑 18세’를 끝으로 온조는 북경으로 갔다. 평생 연예인으로 남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중국행이 제2의 전환점이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비류는 한국에 남아 드라마를 찍으며 홀로서기 준비를 했다.
그러나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딱 3개월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당뇨로 인한 백내장에 걸려 당분간 트럭을 몰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짐을 쌌죠. 그때 울기도 무척 울었는데….”
비류ㆍ온조, 쌍둥이가 다시 뭉쳤다. 그러나 예전의 코믹한 이미지로는 방송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 일을 대신 하기로 했다. 새벽 4시면 트럭에 올라 가락시장으로 향했다.
몸무게 50kg도 안 되는 자매가 매일같이 청과물을 실어나르며 2년여를 보냈다. 2년 뒤 아버지는 “안경쓰고 운전하면 된다”며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3년의 ‘외도’ 끝에 자매는 깨달았다.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쌍둥이는 방송 복귀를 위해 매니저도 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하지만 오랜 공백기간은 높디 높은 현실의 장벽이었다. 방송계는 이들을 잊은 듯했다.
 
◆재기를 향해 거침없이 하이킥 
산산이 부서졌다. 술에 빠지고 인터넷에 빠져 현실서 도망치려 했다. 비류는 우울증에 걸려 15층 아파트 옥상에 선 적도 있었다. 그러나 청춘의 강한 열망이 ‘못다 핀 꽃 두송이’에게 샘물을 부어주었다.
“그래,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김광석의 노랫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26세, 이 ‘바닥’에선 적지 않은 나이지만 후배들과 연기지도를 받고 있다. 비류는 무용을 연습하며, 신체 트레이닝도 하고 있다. 방송인으로 홀로 서겠다는 집념이 어떤 채찍질보다 매섭다.
“산전수전 다 겪다보니 애늙은이 된 것 같아요. 이젠 다른 길은 돌아보지 않을래요. 다음번 인터뷰 땐 어엿한 방송인으로 만나뵐 거예요.”
온조와 비류. 당당한 눈빛에서‘백제 혼의 부활’을 엿본 건 기자의 감상(感傷)이었을까.

프리미엄 최석호 기자 bully21@joongang.co.kr
사진=프리미엄 최명헌 기자 choi315 @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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