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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와 함께하는 제2차 미래 학문 콜로키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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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08면

발제를 맡은 홍성욱 교수

요즘 미래 학문ㆍ연구의 키워드 중 하나는 융합이다. 각 분야의 유명 교수 30여 명이 14일 서울대 미술관에 모여 학문 융합의 과거ㆍ현재ㆍ미래를 논의했다. 올해 3월 29일에 이어 제2회 ‘미래 학문과 대학을 위한 범대학 콜로키엄’을 연 것이다. 발제는 서울대 홍성욱(과학기술사) 교수, 사회는 서울대 김남두(철학) 교수가 각각 맡았다. 서울대 김광웅 명예교수와 이화여대 최재천 석좌교수 등이 참석했으며, 김우식 과학기술 부총리와 서울대 이장무 총장이 각각 축사를 했다. 중앙SUNDAY는 제1차에 이어 이번 제2차 모임의 내용도 지면을 통해 자세히 소개한다.

'야누스적 사고'가 과학의 혁신 불러
상반된 아이디어 동시에 생각하다 발명ㆍ발견 나와

콜로키엄에선 과학기술 분야에서 일어난 네 가지 혁신 사례가 어떤 조건에서 탄생했는지 소개됐다. 서로 모순되는 아이디어를 동시에 생각하는 ‘야누스(여러 얼굴을 가진 로마 신화의 신)적 사고’, 두 개의 개체가 마치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묶어서 생각하는 ‘공(共) 공간적 사고’가 폭발적인 창의력을 끌어낸다는 주장이었다. 다음은 홍성욱 교수의 주요 발제 내용이다.

프랑스ㆍ영국에 비해 뒤처져 있던 독일의 과학 수준이 19세기에 급부상한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연구소가 획기적인 레이더를 개발하고 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사례, 과학계의 ‘기적의 해’로 불리는 1905년 스물여섯 살의 평범한 공무원이던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비롯해 노벨상급 논문 세 편을 한꺼번에 쏟아낸 일, 17세기만 해도 서양의 지식 수준이 동양에 미치지 못했다가 오늘날 역전된 현상. 홍 교수가 꼽은 과학사의 ‘4대 융합’이다.

“의학과 철학의 융합, 이것이 1870년대 독일의 과학 수준이 급격히 올라가고 강대국으로 부상한 배경입니다.”

그 중심에는 빌헬름 분트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생리학을 전공했으나 의대에 자리를 못 구해 1874년 취리히대 철학과 교수로 가게 된다. 분트의 지적 배경은 과학적 기구를 사용해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실험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과학 후진국이었던 독일에서 탄생한 이유다. 새 분야를 선점함으로써 독일은 크게 앞서갈 수 있었다.

MIT 레이더연구소(1940~45)는 인적 구성과 운영 방식 모두 융합의 전형적 사례로 꼽힐 만하다. 연구소에는 물리학ㆍ화학ㆍ전자공학자는 물론 통계학ㆍ경제학자, 음악 전공자까지 있었다.

“물론 이들의 공동 작업이 처음부터 쉽게 이뤄진 건 아닙니다. 사용하는 학문적 언어와 개념이 서로 달랐으니까요.”

전시(戰時)라는 특수 상황, 우수한 레이더를 개발해야 한다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언어를 배워가며 소통이 시작됐다. 연구소의 독특한 운영 방식도 이러한 소통을 도왔다. 물리ㆍ화학 등 전공분야별이 아니라 레이더 부품별로 팀을 구성했다. 한 공간 안에서 지내면서 각기 다른 전공자들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졌다. 홍 교수는 “최근 미국에선 연구소를 설계할 때 실험실보다는 복도나 출입구, 구내식당 등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 지식을 교환하고 융합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직접 찍었다는 서울대 새 연구동 사진을 보여주면서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대학 건물은 융합이 일어나기 힘든 구조”라고 지적했다.

박사 학위가 없는 것은 물론 대학 조교조차 되지 못해 스위스 특허국의 3등 심의관으로 일하던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 등을 발표한 것은 과학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홍 교수는 “오히려 특허국 직원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시계 특허 심사를 맡으면서 시간의 흐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대상의 운동에 따라 변한다는 혁명적인 개념 전환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당시 베른 시내의 시계탑들을 모두 전기 네트워크로 연결해 서로 시간을 맞추도록 했는데, 이것이 ‘상대적 시간’의 개념에 도움을 줬다고도 설명했다.

“논문 세 편이 동시에 발표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 융합의 결과입니다. 각기 다른 주제이지만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동시에 해결됐던 거죠.”

세 주제를 함께 연구하지 않았다면 한 편의 논문도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란 설명이다.

서양이 언제부터 동양을 지적으로 앞서게 됐을까. 17세기 과학혁명과 19세기 말 지식혁명을 거치면서부터라는 것이 사회학자 콜린스의 주장이다. 홍 교수는 “이 두 시기 모두 학계에서 수학과 철학이 융합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지식인 사이의 네트워크가 활발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의 동양에서는 이러한 융합의 움직임이 없었고, 서양에서도 과학ㆍ지식 혁명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라는 것이다.

콜로키엄이 끝난 뒤 참석자들은 갤러리에서 가야금 4중주단 ‘사계’의 새타령을 들으며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었다. 음악과 미술, 과학과 역사가 어우러진 ‘융합’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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