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나라의 비전을 바로잡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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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동남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는 자기 나라를 탈출하려는 사람의 수가 매일 평균 1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나라에서 만난 모 대학교수는 나라의 비전이 없고, 지도자들이 국민을 괴롭히기 때문에 탈출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후진국이란 비전이 없는 나라다. 지도자들이 국가라는 배의 항로를 마음대로 바꾸니 국민이 정착하고 살 수가 없다. 아프리카.남미국가 등 그 예는 수없이 많다. 반대로 선진국이란 분명한 비전이 있는 나라이고 중진국이란 이를 만들어 가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국가경쟁력이 강한 스위스.싱가포르.미국 등 일류 선진국은 지도자들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국가 비전을 가지고 있다. 미국이 좋은 예다.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 MIT 교수에 따르면 미국의 비전은 1776년 독립선언서에서 정한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세 가지다. 그 이후 미국은 대통령이 수없이 바뀌었지만 비전만큼은 확고부동했다. 때문에 200년 이상 국력을 한 방향으로 집중해 세계 최강의 부자 나라가 됐다.

세계 최강 인종 유대인이 국가도 없이 수백 년간 전 세계에 흩어져 살다가 다시 뭉쳐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변치 않는 유대교의 비전 때문이다. 이는 비전 문제 권위자인 짐 콜린스의 말이다. 이처럼 비전은 국력을 한 방향으로 집중시키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시대를 맞아 미국에 버금가는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미국에서처럼 누구도 바꿀 수 없는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 부서마다, 또는 관민이 다른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국가전략은 비전실현을 위한 것인데 비전이 잘못되면 전략도 잘못된다. 지도자들의 잘못된 비전은 국력 낭비를 넘어 파괴로 이어진다.

둘째, 국가 비전은 국민을 위한 것인데도 한국은 동아시아 중심국가, 선진한국 등 국가 차원의 비전만 강조해 왔다. 미국의 '생명, 자유, 행복 추구'처럼 국민 차원의 비전이 필요하다. 우리 헌법(전문)은 '안전, 자유, 행복'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비전과 대동소이하다. 어느 원로 경제인은 이에 덕(德)을 추가하면 아주 좋을 것이라고 했다. 비전은 궁극적으로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셋째, 비전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한다. 가령 삼성이 지금처럼 성장하면 10년 뒤 매출액이 얼마가 된다는 것은 전망이지 비전이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재.제품.사업.조직 등의 끊임없는 창조 같은 것이 비전이다. 비전은 짐 콜린스가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5년이 걸렸다고 할 정도로 난해한 것이다.

넷째, 비전은 네 개의 부분으로 구성돼 있는 하나의 틀이다. 두 가지는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기본사상(이데올로기)이며, 다른 두 가지는 비전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다. 이는 비전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미국의 '생명, 자유, 행복'은 자손대대로 추구할 비전 목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 즉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시장경제)가 필요하다. 이 두 가지는 선진국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가입조건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는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비전의 다른 두 가지 부분은 비전의 실현을 위한 중장기 계획이다. 하나는 '2020년 한국의 일류선진국 진입'과 같이 10~30년간에 걸친 대담한 목표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경제 5강 진입'과 같은 이의 구체적 표현이다.

한국의 비전은 지금까지 비전 실현을 위한 계획에만 치중해 왔다. 앞으로 일류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앞의 두 가지, 즉 이데올로기와 그 목표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실현시키기 위한 계획도 바로잡힌다. 한국에는 기업경영인을 비롯해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간 인재들이 수없이 많다. 이들로 하여금 세계 최고 수준의 비전을 정하도록 했으면 한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