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협 살림 30년 외길-오병환 탁구협회사무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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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올림픽 10위권의 한국스포츠영광 뒤엔 선수들의 그늘에서 묵묵히 이들을 뒷바라지한 숨은 공로자들이 있다.
대한체육회 가맹 44개 경기단체의 사무국은 바로 한해의 살림살이 계획과 집행, 적게는 10여개에서 많게는 50여개에 이르는 각종 국내·외 대회 준비와 기록정리 등 선수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질구레한 일을 총괄하는 기구로 경기인들에겐 마치 어머니가 계신 고향처럼 기대고픈 곳이다.
이러한 경기단체의 한 사무국장으로 만30년의 외길인생을 살아온 이가 있어 화제가 되고있다.
올해 근속 30년을 맞아 경기단체 사무국장 중 최장수국장의타이틀(?)을 거머쥐게 된 「탁구계의 백과사전」오병환(53)탁구협회 사무국장이 바로 그 주인공.
최원석 대한탁구협회장의 동정에서 김택수(대우증권) 현정화(한국화장품) 등 스타플레이어들의 컨디션은 물론 코흘리개꼬마 탁구선수들의 근황에 이르기까지 탁구와 관련된 일이라면 좀처럼 그의 시야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로 하여금 강산이 바뀌어도 세번이나 바뀌었을 긴 세월동안 오직 한자리만 지키는「장의 탁구인생」을 살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결과는 「필연」이었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강원도 횡성 출신으로 한때군(군)내 축구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그가 탁구와 인연을 맺게된 것은 지난 62년.
5·16 이듬해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생계가 어려워진 그는 무작정 돈을 벌어야 된다는 생각에 대학(단국대 2년)을 포기하고 당시 탁구협회 총무이사이던 원영호씨의 주선으로 탁구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협회 사무실도 따로 없는 마당에 전화·캐비넛은 사치품 축에 들었고 책상과 의자 하나씩만 달랑 차려진 체육회 건물(현 플라자호텔 자리)3층에서 탁구협회 사무직요원 1호이자 유일한 협회직원으로 출발했다.
각종 대회의 역대 기록이 남아있을 턱이 없어 그가 맨 처음 시작한 일은 한국탁구의 역사서술과도 같은 기록수집과 정리, 그리고 신문스크랩이었다.
그가 지금도 자신의 재산목록 1호로 애지중지하는 스크랩은 현재 1백16권째를 기록, 애환 서린 한국탁구 30년의 역사를 담고있다.
그러나 협회 초창기에는 이같이 앉아서 하는 것보다 탁구대를 메고 2, 3층의 경기장까지 운반하는 등 막일이 더 많았다고 그는 너털웃음을 짓는다.
20대 초반의 한창 나이라 힘든 줄도 몰랐지만 자신이 나르는 탁구대 위에서 조국의 명예를 짊어진 스타들이 나온다는 자부심에 고생이란 생각은 눈꼽만큼도 안해 봤단다.
바로 이 자부심(본인의 말을 빌리면 사명감)이 그를 30년 동안 탁구협회에 붙들어놓은 원동력이었다.
88년 서울올림픽 유치로 일이 홍수처럼 많아진 80년대 초반에야 후배 직원들을 맞을 수 있어 근 20년만에 유일 직원의 꼬리표를 뗄 수 있었던 그가 그동안 모신 회장만도 초대 김세련 당시 한국은행총재를 시작으로 김종락·육인수·김창원·강재량·조중건·채영철 전회장과 최원석 현 회장 등 모두 8명.
가장 신나던 기억으론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68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여자팀이 한국탁구사상 처음으로 숙적 일본을 꺾고 우승, 카퍼레이드까지 벌이는 대환영을 받았을 때를 꼽는다.
반면 가장 쓰라린 추억은 북한측의 방해공작으로 79년 평양세계선수권대회 참가가 끝내 좌절돼 이역만리 스위스 제네바에서 선수단 20여명이 1주일동안 북한대사관에 찾아가 항의농성을 벌인 일이다.
그는 자신이 탁구 경기인 출신이 아니어서 어느 파벌싸움에도 휘말리지 않아 장수할 수 있었지만 탁구사랑만큼은 어떤 경기인과 겨뤄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유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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