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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士 레이펑보다 스타 야오밍 원하는 중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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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07면

중국은 시대 흐름에 맞는 사회적 가치 구현을 위해 1930년대 옌안 정부 시절부터 끊임없이 영웅을 탄생시켜 왔다. 위 왼쪽은 마오쩌둥 시대의 영웅인 모범 전사 레이펑, 오른쪽은 현대의 영웅인 농구 스타 야오밍이다. 아래는 중국 내 최고 부자 마을을 만든 화시촌의 우런바오. 중앙포토

마오쩌둥(毛澤東)은 공동체 사회를 꿈꿨다. 그러나 인민공사 제도와 대약진 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난국을 타개할 영웅이 필요했다.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마오에 충성할 모델이 절실했다.

'인민의 영웅 이젠 국가 아닌 市場이 만든다'

1963년 당시 국방부장 린뱌오(林彪)가 발견한 인물은 레이펑(雷鋒)이었다. 40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레이펑은 6세 때 고아가 됐다. 그에게 공산당은 희망이었다. 인민해방군에 가입하고, 60년 입당했으나 2년 뒤 작업 중 사고로 숨진다. 스물둘이었다. 전쟁 영웅도 아니고, 죽음도 영웅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영웅이 된 것은 그가 남긴 일기 때문이었다. 생애 마지막의 3년 일기에서, 그는 마오에 대한 감사와 인민에 대한 봉사를 적었다. “61년 10월 15일. 내무반 동지를 위해 5개의 침대보를 빨았고, 취사병을 도와 야채 600근을 씻었다… 동지들은 누가 세탁했는지 몰랐다. 이름 없는 영웅이 되는 건 영광스럽다.” 린뱌오는 군인 사상교육을 위해 레이펑을 이용했다. 이어 '레이펑으로부터 배우자'는 운동이 대륙에 물결쳤다.

60년대 중국의 영웅은 레이펑처럼 젊고, 개인의 안위를 희생해 공동체에 기여한 인물이었다. 또 마오의 이상을 추종했다. 이런 기반 위에서 문혁이 가능했던 것이다.
50년대 후반 중ㆍ소 관계가 악화되면서 경제적 자립이 중요한 사회적 가치가 됐다. 마오는 자력으로 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시도했다. 64년 마오가 내건 구호는 ‘공업은 다칭(大慶)에서, 농업은 다자이(大寨)에서 배우자’였다. 자립경제를 위해선 석유 자급이 필요했는데 헤이룽장(黑龍江)성 다칭에서 유전이 발견됐다. 변변한 설비도 없던 노동자들은 혹한의 날씨에 맨손으로 임무를 완수했고, 다칭은 공업 모델로 선언됐다. 농업 모델 다자이는 산시(山西)성의 산골 마을. 산지 개간을 통해 척박한 환경을 극복했고, 고된 육체노동에 참여했던 마을 당서기 천융구이(陳永貴)는 75년 부총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국가 캠페인에 의한 영웅 탄생은 한계를 드러냈다. 생산량을 부풀리는 등 곳곳에서 가짜 모델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1978년 안후이성 샤오강촌 주민 18명은 농지를 가구별로 나눠 경작하자는 당시로선 불법인 비밀계약을 맺었다. 촌민 옌진창이 당시 자신이 서명한 문서에서 자신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중앙포토

마오 사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해 생산력 발전을 꾀하면서 영웅의 모습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불법적으로라도 시장에서 성공할 경우 훗날 이를 국가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영웅이 탄생했다.

대표적 사례가 안후이(安徽)성 샤오강(小崗)촌. 겨울이면 아사자가 발생하곤 하던 이 마을은 78년 주민 18명이 불법적으로 토지를 가구별로 나눠 경작하기로 하는 비밀 계약을 했다. 적발돼 죽임을 당하면 자식은 이웃이 돌본다는 비장한 각오였다. 시도는 성공했고, 당국으로부터 인민공사를 폐지케 하는 모델로 추앙받았다. 새 시대 새 영웅은 국가 권력의 바깥에서 성장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이나 기업이었다.

톈진(天津)의 마을 다추좡(大邱庄) 사례는 극적이다. 마을 당서기 위쭤민(禹作敏)은 토질이 척박해 도저히 생산성을 높일 수 없자 당시 농촌에서는 불법인 공업 건설에 나선다. 78년 강판을 생산한 뒤 인맥과 뇌물을 동원, 톈진에 팔아 큰돈을 벌었다. 87년 위쭤민은 10대 농민 기업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92년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조사하려는 경찰의 마을 진입을 무력으로 저지하다 체포되며 다추좡의 기적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씨앗을 뿌렸으니 현재 ‘천하제일촌(天下第一村)’으로 불리는 장쑤(江蘇)성 화시(華西)촌의 발전을 낳은 것이다.

화시촌의 마을 당서기 우런바오(吳仁寶)는 다추좡을 방문한 뒤 큰 감명을 받았다. 시장경제 정신을 배운 것이다. 60년대 말부터 불법적으로 마을에 철공소를 세웠던 우런바오는 다추좡 견학 후 시장에서 통하는 중공업 건설에 착안했다. 대성공을 거둬 2006년엔 매출액 400억 위안(약 4조8000억원)을 기록했다. 98년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이 마을을 방문하는 등 90년대 중반엔 연 100만 명 이상이 ‘화시촌 성공’을 배우러 몰려들었다. 이제 부(富)는 육체노동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공장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2002년 당장(黨章) 개정을 통해 노동자ㆍ농민뿐 아니라 자본가도 품에 안는다고 선언했다. 2005년 4월의 ‘전국 모범 노동자(全國勞模)’ 선정은 이러한 중국의 사회가치 변화, 이에 따른 영웅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미국 프로농구에 진출해 엄청난 달러를 벌어들이던 농구 스타 야오밍(姚明)이 모범 노동자로 선정됐다. 류융하오(劉永好) 새희망집단 동사장 등 사영 기업가 30여 명에게도 처음으로 모범 노동자 칭호가 주어졌다. 시장경제에서의 성공자, 즉 부자가 현대 중국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시대가 열렸다.

과거 마오 시대 영웅은 레이펑처럼 국가의 표창에 의해 탄생했다. 그러나 이제 중국의 현대 영웅은 시장경제에서 성공하거나, 언론을 통해 대중의 인정을 받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부자들에게 모범 시민의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이미 선망의 대상이 돼 있는 부자들에게 또 하나의 상징적 자본을 수여함으로써 그들을 국가의 질서 안으로 포섭하려는 것이다. 탈사회주의 시대에 들어선 중국이 국가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해 벌이고 있는 힘겨운 노력이다.

1950년 이후 13차례 '영웅' 선발 행사

민족주의자들은 흔히 영웅들을 만들어내고 이들을 통해 새로운 가치와 정체성을 대중
에게 불어넣는다. 중국의 영웅 만들기가 시작된 건 1930년대 말 옌안(延安) 정부 시대.

공산당은 전쟁 영웅과 노동 영웅을 선정해 경제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보상하고, 또
학습 대상으로 삼았다. 45년까지만 1만2000명의 영웅이 탄생했다.

중국에서 영웅은 보통 ‘모범 노동자(勞動模範)’나 ‘선진공작자(先進工作者)’로 불린다.

모범 노동자는 주로 공업과 농업 분야에서 선발되며, 선진공작자는 국가기관이나 기구
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서 선발된다. 중국 중앙정부는 전국 모범 노동자를, 성 정부는 성급 모범 노동자를 선정해 표창한다. 학교나 군대도 나름대로 영웅을 뽑기도 한다. 중앙정부가 거행하는 전국 모범 노동자 표창 의례는 50년 이후 13차례 있었다. 전국 모범 노동자 표창은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의례로, 그 상징적 의미가 매우 커 중국 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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