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관념' 의 진보를 모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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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사회의 풍경은 평등주의의 황혼기라 할 만하다."(김종엽 교수.한신대 사회학)

"진정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진보와 더 급진적인 진보주의가 아니라, 진보 관념에 대한 성찰이다."(윤해동 연구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역사학)

'진보 담론'을 재정립하려는 시도가 지식사회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6월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실천문학''문학과사회''사회비평'등 계간지(2007년 여름호)들이 진보 이념을 재조명하는 특집을 잇달아 마련했다. 6월민주항쟁20년사업추진위원회(상임공동대표 지선스님)는 연속 기획강좌('상상변주곡-민주화 20년, 문화 20년'.총 9회)를 진행하며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6월민주항쟁 20주년은 연말 대선과 맞물려 더욱 주목받는다. 대선은 일종의 '이데올로기 격전장'역할도 해왔기 때문이다.

◆ 민주화 20년 우울한 자화상=6월항쟁 20주년 기획물들은 대부분 다소 우울한 논조를 띄고 있다. 선거에서 잇달아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해온 범진보진영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대선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하기에 고민은 가중된다. '실천문학'은 진보진영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민주화운동에 관계했다는 사실이 지금처럼 불명예가 되었던 적은 없었다."('실천문학' 머릿글, 편집위원 일동)

6월항쟁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는 이들에게 오늘의 현실은 실망스럽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희생에 대한 존경은 간데없고 오히려 냉소와 희화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원인을 '실천문학'편집위원들은 "노무현 정권의 실망스러운 정치 행태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나아가 "문제는 현 정권을 제어하고 대체할 수 있는 활력을 어디에서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우려했다.

◆ 경제 민주화 vs 선진화=6월항쟁을 주도한 386세력 중 일부가 현재 뉴라이트의 핵심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은 20년 전과의 차이와 변화를 극명하게 느끼게 한다. 이른바 전향 386 뉴라이트들은 새로운 보수 담론인 '선진화론'을 앞장서 주도하고 있다. 건국-산업화-민주화를 잇는 시대정신은 선진화란 주장이다.

이에 맞설 진보 담론의 주류는 '민주주의 지속'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6월항쟁과 민주화의 성과를 계속 이어가자는 뜻이다. 6월항쟁 이후 20년간의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이제는 경제적 민주화 등으로 한 단계 더 진보할 단계라는 내용으로 구체화된다. 하지만 그같은 소망이 현실로 연결될지는 미지수다.

'사회비평'의 특집좌담에는 이 같은 진보 진영의 고민이 함축돼 있다.

"87년 이후의 이념적 지형은 한마디로 진보적 이념의 몰락이라 할만하다."(김상봉 교수.전남대 철학)

"대안의 모색이라고 하는 것은 평등주의를 더 강화할 수 있느냐 아니면 이제는 불평등하고 위계적인 세계를 수용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어디를 향할 것인가와 연계된다."(김종엽 교수)

◆ 87년 체제냐 97년 체제냐=민주화론과 선진화론의 장점을 살려 제3의 길을 찾는 진보 담론도 나왔다. 김호기 교수는 '사회비평'기고를 통해 6월항쟁의 성과인 민주화 체제(87년 체제)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외환위기 이후의 '97년 체제'에 주목했다. 우리 사회의 현안인 비정규직.청년실업.고령화 등이 모두 세계화와 관련된 문제들로서 민주화운동 패러다임으로는 풀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세계화에 대한 기존의 좌우의 태도를 넘어서 '지속가능한 세계화'가 앞으로 추구해야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윤해동 교수가 "20세기 진보관념을 진보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아 쓴 '문학과사회'기고도 주목된다. 윤 교수는 "인류가 서구적 가치를 중심으로 단선적으로 진보해왔다는 믿음은 이제 버려야 한다"며 탈근대적 비전을 진보 개념에 포괄시킬 것을 제안했다.

◆ 전국 17곳 민주주의 시민축제=6월항쟁20년사업추진위원회의 공식 표어는 '6월이다, 다시 날자'. 하지만 '다시 날 것'이라고 확언하는 이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저마다 처한 위치에서 6월항쟁의 성과와 한계를 음미하며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추진위원회의 한 인사는 "민주화의 열정으로 뭉쳤던 그 6월이 다시 오면 좋겠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공통의 이슈가 없지 않은가"라는 말로 6월항쟁 20주년을 맞는 진보 진영 내 분위기를 전했다. 추진위원회가 주관하는 '민주주의 시민축제'가 6월 9.10일 전국 17개 도시에서 열린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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